김시습전(金時習傳)

 

이 글은  율곡의 나이 47세 7월에 지은 것으로, 대부분 김시습에 대해 있는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였으며, 다만 끝에 저자의 의견을 덧붙여 절의와 윤기를 내세워 백세지사(百世之師)로 찬양하여 그의 억울한 울분의 넋을 달래주고자 하였다.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고 관은 강릉(江陵)이다. 신라 알지왕(閼智王)의 후손에 주원(周元)이라는 왕자가 있어 강릉을 식읍(食邑: 공신에게 내리어 조세(租稅)를 받아쓰게 한 고을)으로 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눌러 살아 관향으로 하였다.

그 후에 연(淵)이 있고 태현(台鉉)이 있었느데 모두 고려의 시중(侍中)이55) 되었다. 태현의 후손 구주(久住)는 벼슬이 안주목사(安州牧使)에 그쳤는데, 겸간(謙侃)을 낳았으니 그의 벼슬은 오위부장(五衛部將)에56) 그쳤다. 겸간이 일성(日省)을 낳으니 음보(蔭補: 벼슬을 조상의 음덕으로 얻는 것.)로 충순위(忠順衛)가 되었다.

일성이 선사 장씨(仙사 張氏)에게 장가들어 선덕 10년(宣德十年: 世宗 17년, 1435) 시습을 한사(漢師:지금의 서울)에서 낳았다. 특이한 기질을 타고나 생후 겨우 여덟달에 스스로 글을 알아보았다. 최 치운(崔致雲: 본관 강릉(江陵). 세종 때 평안도 도절제사(都節制使) 최윤덕(崔潤德)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웠다.)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기어 이름을 시습이라고 지었다. 말은 더디었으나 정신은 영민하여 문장을 대하면 입으로는 잘 읽지 못하지만 뜻은 모두 알았다. 3세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5세에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통달하니 사람들은 신동이라 불렀다. 명공(名公) 허 조(許稠)57)등이 많이 보러갔다.

장헌대왕(莊憲大王: 세종대왕의 시호.)께서 들으시고 승정원으로 불러들여 시로써 시험하니 과연 빨리 지으면서도 아름다웠다. 하교(下敎)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친히 보고싶으나 세속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할까 두려우니, 마땅히 그 집에서 면려(勉勵)하게 하며 들어내지 말고 교양을 할 것이며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하시고 비단을 하사하시어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명성이 온나라에 떨쳐 오세(五歲)라고 호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시습이 이미 임금의 장려하여 주심을 받음에 더욱 원대한 안목으로 학업을 힘썼다.

그런데 경태(景泰:명 태종의 연호 1450-1467)의 년간에 영릉(英陵:세종대왕을 이름.) · 현릉(顯陵:문종대왕을 이름.)이 연이어 돌아가시었고, 노산(魯山:단종을 이름.)은 3년되는 해에 왕위를 손위(遜位)하였다. 이 때에 시습의 나이 21세로 마침 삼각산(三角山)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서울로부터 온 사람이 있었다. 시습은 즉시 문을 닫아 걸고 3일동안 나오지 않다가 이에 크게 통곡하고 서적을 몽땅 불살라 버렸으며, 광증을 발하여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자취를 불문(佛門)에 의탁하고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그리고 여러번 그 호를 바꾸어 청한자(淸寒子)·동봉(東峯)·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그의 생김 생김은 못생기고 키는 작았다. 뛰어나게 호걸스럽고 재질이 영특하였으나 대범하고 솔직하여 위의(威儀)가 없고 너무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했다.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분개한 나머지 심기(心氣)가 답답하고 평화롭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세상을 따라 어울려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육신에 구애 받지 않고 세속 밖을 노닐었다. 국중(國中) 산천은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고 좋은 곳을 만나면 머물러 살았으며, 고도(故都)에 올라 바라볼 때면 반드시 발을 동동 구르며 슬피 노래하기를 여러 날이 되어도 마지않았다.

총명하고 영오(穎悟)함이 남달리 뛰어나서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시·서·역·예기·주례·춘추)은 어렸을 때 스승에게서 배웠고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전수(傳受)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섭렵(涉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번 기억하면 끝내 잊지아니하므로, 평일에는 독서하지 않고 또한 서책을 싸가지고 다니지도 않지만 고금의 문적(文籍)을 빠짐없이 관통하여 사람들이 질문을 하면 의심할 여지없이 즉시 응대하였다. 돌무더기가 뭉쳐 있는 듯 답답하고 의분과 개탄으로 차있는 심흉(心胸)을 스스로 시원하게 풀어볼 도리가 없었기에 무릇 세상의 풍·월·운·우(風月雲雨), 산림·천석(山林泉石), 궁실·의식(宮室衣食), 화과·조수(花果鳥獸)와 인사(人事)의 시비·득실(是非得失), 부귀·빈천, 사생·질병, 희·노·애·락(喜怒哀樂)이며, 나아가 성명이기(性命理氣)·음양유현(陰陽幽顯:음은 유하고 양은 현하다.)에 이르기까지 유형무형(有形無形)을 통틀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면 모두 문장으로 나타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문장은 물이 솟구치고 바람이 부는 듯하며 산이 감추고 바다가 머금은 듯 신(神)이 메기고 귀신이 받는 듯 특출한 표현이 거듭거듭 나와 사람으로 하여금 실마리를 잡을 수 없게 하였다. 성률(聲律)과 격조(格調)에 대하여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지만 그중에서 빼어난 것은 사치(思致: 생각의 운치)가 높고 멀어 일상의 생각에서 뛰어났으므로 문장이나 자질구레하게 다듬어 수식하는 자로서는 따라 갈 수 없는 터이었다.

도리(道理)에 대해서는 비록 완미하여 탐색하고 존양(存養:존심 양성)58)하는 공부가 적었지만 탁월한 재능과 지혜로써 이해하여, 횡담(橫談)·수론(竪論)하는 것이 대부분 유가(儒家)의 본지를 잃지 않았다. 선가(禪道)와 도가(道家)에 대해서도 또한 대의를 알았고 깊이 그 병통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선어(禪語:선문禪門의 말) 짓기를 좋아하여 현모하고 은미한 뜻을 발휘 천명하되, 날카로와 훤해서 막히는 것이 없었으므로 비록 이름높은 중으로서 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도 감히 그 칼란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그의 타고난 자질이 빼어났음을 이것을 가지고도 징험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명성이 일찍부터 높았는데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하여 마음으로는 유교를 숭상하고 행동은 불교를 따라 한 시대에 괴이하게 여김을 당하였다고 여겼으므로 그래서 짐짓 미쳐서 이성을 잃은 모양을 하여 진실을 가렸다.

글을 배우고자하는 선비가 있으면 나무나 돌을 가지고 치거나 혹은 활을 당기어 쏘려는 듯이하여 그 성의를 시험하였으므로 문하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적었다. 또 산전(山田)을 개간하기 좋아하여 비록 부귀한 집안의 자제라도 반드시 김을 매고 거두어들이는 일을 시키는 등 매우 괴롭혔으므로 끝까지 학업을 전수받는 자는 더욱 적었다.

산에 가면 나무껍질을 벗겨 하얗게 하여 시 쓰기를 좋아 하였으며 외워 읊조리기를 얼마동안 하고나서는 번번이 통곡하고 깎아버리곤 하였다. 시를 혹 종이에 쓰기도 하였으나 남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대부분 물이나 불 속에 던져벼렸다. 혹은 나무를 조각하여 농부가 밭갈고 김매는 모양을 만들어 책상 옆에 벌려놓고 하루 종일 골똘히 바라보다가는 통곡하고 불태워 버리기도 하였다. 때로는 심은 벼[禾]가 아주 무성하여 잘 여믄 모습이 완상(玩賞)

할만하면 술에 취해 낫을 휘둘러 온 이랑을 다 베어 땅에 내어 버리고서는 큰 소리로 목놓아 통곡하기도 하였다. 행동거지가 종잡을 수 없었으므로 크게 세속사람들의 비웃어 손가락질하는 바 되었다.

산에 살고 있을 때 찾아오는 손을 보고서 서울 소식을 물어, '마구 비웃고 꾸짖는 사람이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의례 기쁜 빛을 하고 만일, '거짓으로 미쳤으며 속에 포부가 있다고 하더라'하면 문득 눈살을 찌푸리면서 기뻐하지 않았다. 사령을 받은 고관이 혹 인망이 없는 사람이면 반드시 통곡하여 이르기를, "백성이 무슨 죄 있길래 이 사람이 이 자리를 맡는가" 하였다.

그 당시에 명경(名卿:이름있는 공경) 김 수온(金守溫)59)과 서 거정(徐居正)60)은 국사(國士:나라의 모범되는 선비)로 상찬(賞讚)되었다. 거정이 바야흐로 행인을 물리치고 바삐 조회에 들어가는데, 시습이 남루(藍縷)한 옷차림에 새끼줄로 허리띠를 두르고 폐양자(蔽陽子:천한 사람이 쓰는 백죽립(白竹笠)을 폐양자라 일컫는다.)를 쓰고서 저자에서 만났다. 시습은 앞에서 인도하는 무리를 무시하고 머리를 쳐들고 불러 말하기를 "강중(剛中:거정의 자.)이 편안한가"하였다. 거정은 웃으면서 이에 응답하고 초헌(초軒:대부가 타는 수레)을 멈추어 서로 대화를 나누니, 온 저자 사람들이 놀라는 눈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조정의 선비로서 시습의 모욕을 당한 사람이 참지 못하여 거정을 보고서 상주하여 그 죄를 다스려야겠다고 하니 거정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그만두시오, 미친 사람과 무얼 따질 것이 있겠소. 지금 이 사람을 죄주면 백대(百代)후에 반드시 공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이오." 하였다.

김 수온이 지관사(知館事)로서 "맹자 견양혜왕(孟子見梁惠王)"이라는 논제를 가지고 태학(太學:성균관을 이름)의 유생들을 시험하였다. 어떤 상사생(上舍生:진사나 생원을 이름)이 삼각산에 가서 시습을 보고 말하기를, "괴애(乖崖:수온의 별호)가 장난을 좋아합니다. '맹자 견양혜왕'이 어찌 논제에 합당하겠습니까." 하였다. 시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노인이 아니면 이 논제를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고 이에 붓을 들어 재빨리 한편의 글을 만들어 주며 말하기를, "생원이 스스로 지은 것처럼 해서 이 노인을 한번 속여 보시오." 하였다. 상사생이 그 말대로 따라하였더니 수온이 끝까지 읽지도 않고 급히 묻기를. "열경이 지금 서울의 어느 절에 머물고 있는가" 하였다. 상사생은 숨길 도리가 없었으니 그 알려짐이 이와 같았다. 그의 이론은 대략 '양혜왕은 왕을 참칭(僭稱)한 자이니, 맹자가 만나서는 안된다.'는 내용인데 지금은 그 글이 없어져서 수집하지 못한다.

수온이 죽은 뒤 그가 좌화(坐化:앉아서 죽는 것.)하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시습은 말하기를, "괴애는 욕심이 많은데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는가 설혹 있었다 하더라도 좌화는 예가 아니다. 나는 다만 증자(曾子)의 역책(易책)61)과 자로(子路)의 결영(結纓)62)을 들었을 따름이오. 다른 것은 알지못한다." 하였다. 아마 수온이 부처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성종(成宗) 12년(1481) 시습의 나이 47세였다.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제문을 만들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은 대략 이러하였다.

 

"제(帝:순임금을 이름.)께서 오교(五敎:오륜을 이름.)를 베푸심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 맨앞에 위치하고 죄가 3천가지로 나열되지만 불효의 죄가 가장 크옵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살고 있는 이 누구인들 부모의 길러주시고 교육하여 주신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고 미련한 소자는 본지(本支)63)를 사승(嗣承)하여 이어나가야 하온데 이단(異端:불교와 노장)에 침체(沈滯)하여 말년에서야 겨우 뉘우치고 있습니다. 이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탐색하여 추원(追遠)64)하는 큰 의례를 강구하여 정하고, 청빈한 생활을 참작하여 간략하지만 정결하기를 힘쓰며 성의가 담긴 제수를 차리려 애썼습니다. 한무제(漢武帝)는 70세에야 비로소 전 승상(田丞相)65)의 <선술(仙術)을 멀리하라>는 말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100세에야 허 노재(許魯齋)66)의 <인의강상(仁義綱常)>의 권고에 감화하였습니다. 운운(云云)."

드디어 안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다. 많은 사람들이 벼슬하라고 권하였으나 시습은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고 방광(放曠)67)하기를 예와같이 하였다. 달 밝은 밤을 만나면 이소경(離騷經)68) 외우기를 좋아하였고, 외우고 나면 반드시 통곡하였다. 혹 송사하는 곳에 들어가 사곡(邪曲)한 것을 정직한 것으로 만들어 궤변(詭辯)을 부려서 반드시 이겼으며, 판결 문안이 이루어지면 크게 웃고 파기하기도 하였다. 뛰노는 시동(市童)들과 어울려 놀며 취하여 길가에 드러눕기 일수였다. 하루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69)이 저자를 지나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저놈을 멈추게 하라"고 하였다. 창손은 듣지 못한 체 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위험한 일로 여기어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절교하였는데 다만 종실(宗室:왕족을 이름.)인 수천부정(秀川副正) 정은(貞恩)70)과 남 효온(南孝溫)71)·안 응세(安應世)72)·홍 유손(洪裕孫)73) 등의 무리 몇 사람만이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효온이 시습에게 묻기를, "나의 소견은 어떠한가."하니, 시습은 대답하였다. "창구멍으로 하늘을 엿보는 거지"(소견이 적은 것을 이른다.) 효온이 "동봉 그대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시습은 말하였다. "넓은 뜰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는 거네"(소견은 높지만 행실이 미치지 못함을 이른 것이다.) 하였다.

얼마 안되어 아내가 죽자, 다시 산으로 돌아가 두타(頭陀)(중이 머리를 깎아 눈썹과 같게 한 것을 두타라고 한다.)의 모습을 하였다.

강릉과 양양 지방에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였고 설악(雪嶽)·한계(寒溪)·청평(淸平)등지의 산에 많이 있었다. 유 자한(柳自漢)74)이 양양의 원으로 있으면서 예로써 대접하며 가업을 회복하여 세상에 나가기를 권하자 시습은 이를 서신으로 사절했는데, 거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장차 장참(長 :긴 자루가 달린 가래. 농기구의 한 가지.)을 만들어 영출(령朮:복령과 창출)이나 캐겠소. 온 나무가 서리에 얼어붙거든 중유(仲由)의 온포(縕袍)75)를 손질하고, 온산에 백설이 쌓이거든 왕 공(王恭)의 학창(鶴창)76)을 매만지려 합니다. 낙백(落魄)77)하여 세상에 사는 것보다는 소요(逍遙)하며 한 평생을 보내는 편이 나을 것이요, 천년 후에 나의 속뜻[素志]을 알아주기 바라는 바이요."

성종 24년(1493)에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병들어 누워 서거하니 향년 59세였다. 우연을 하여 화장하지 말고 절옆에 임시로 빈소차림을 하여 놓아 두라고 일렀다. 3년후에 장사지내려고 빈소를 열어보니 안색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중들은 놀라 탄식하며 모두 부처라고 하였다. 마침내 불교식에 의하여 다비(茶毗:불교의 화장의 명칭)하고 그뼈를 취하여 부도(浮圖)(작은 탑)를 만들었다.

생존시에 손수 늙었을 때와 ?었을 때의 두 개의 화상을 그리고, 또 스스로 찬(贊)78)을 지어 절에 남겨 두었다. 찬의 끝에 이르기를,

 네 모습이 지극히 못났는데, 爾形至  

 네 말 너무 당돌하니, 爾言大동

 마땅하도다 네가 宜爾置之

 구렁텅에 빠짐이어 溝壑之中

하였다.

 지은 시분은 산실(散失)되어 십분의 일도 보존되지 못하였는데 이자(李자)79)·박 상(朴祥)80)·윤 춘년(尹春年)81)등이 선후 수집해서 세상에 인쇄하여 내놓았다고 한다.

신 삼가 생각컨대,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는데, 청하고 탁하며 후하고 박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면서 아는 생지(生知)와 배워서 아는 학지(學知)의 구별이 있으니, 이것은 의리(義理)를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습과 같은 사람은 문(文)에 대하여 나면서부터 터득했으니 이는 문장에도 생지가 있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미친 짓을 하여 세상을 도피한 은미한 뜻은 가상하나 그렇다고 굳이 윤리의 유교를 포기하고 방탕하게 스스로 마음내키는 대로 한 것은 무엇입니까. 비록 빛을 감추고 그림자마저 숨기어 후세로 하여금 김시습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한다 한들 도대체 무엇이 답답할 것 있겠습니까. 그 인품을 상상해 보건대 재주가 타고난 기량(器量)의 밖으로 넘쳐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였던 것이니, 어찌 경청(輕淸)한 기(氣)를 받기는 풍족한데 후중(厚重)한 기를 받기는 부족하였던 이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절의(節義)를 표방(標榜)하고 윤리를 심어 그 심지를 구극(究極)하여 보면 일월(日月)로 더불어 광채를 다툴 만합니다. 그러므로 그 기풍(氣風)을 접하면 나약(懦弱)한 사람도 감흥하여 일어서게 될 것이니 비록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시습의 영특한 자질을 가지고 학문과 실천을 갈고 닦으며 힘썼던들 그 이룩한 바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 바른말과 준엄한 논의로 기피(忌避)해야 할 것도 저촉하며, 공(公)·경(卿)을 매도(罵倒)해 조금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 당시에 그의 잘못을 들어 말한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선왕의 성대하신 덕과 높은 재상들의 넓은 도량은, 말세에 선비로 하여금 말을 공손하게 하도록 하는 것과 견주어 볼 때, 그 득실이 어떠하겠습니까. 아! 거룩합니다.

 

< 주 >

55) 고려시대 광평성(廣平省)·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문하부(門下府)의 으뜸가는 벼슬.

 

56) 조선조의 군제(軍制)는 오위(五衛)이었고 장(將)밑에 여러 군직이 있으니 부장은 이 중의 하나이다.

57) 세종조의 문신, 경사(經史)에 정통하고 좌의정으로 치사하였다.

58)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 말. 동정을 통해 마음과 성품을 존양(存養)하여 간담함이 없는 것, 계구·신독(戒懼愼獨)하는 것이 존심이고 사물의 이치를 잘 알아 순리대로 따르는 것이 양성이니 지지·능득(知止能得)을 내용으로 한다. 존양만을 말하면 성찰을 포함하나 양자를 나누어 말하면 존양은 정시 공부이고 성찰(省察)은 동시 공부이다. 《孟子·盡心上

59) 1409년(태종 9)∼1481년(성종 12)의 인물로 벼슬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고 문장이 뛰어나 서 거정·강 희맹 등과 겨루었다. 고승(高僧) 신미(信眉)의 동생이다.

60) 1420년(세종 2)∼1488년(성종 19)의 인물, 학문 문장에 능하였고 여섯왕을 섬겨 45년동안 봉사한 전형적인 관원이다. 육조(六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까지 이르렀다.

61) 역책(易 ): 증자의 병이 위독할 때 계손(季孫)이 준 대자리는 대부나 까는 것이었다. 증자는 대부가 아니었으므로 예에 부당하다 하여 그 대자리를 바꾸게 하고 이내 죽었다. 그러므로 죽어갈 때를 역책이라고도 한다.

62) 자로는 춘추시대 노(魯)나라 변(卞)지방 사람이다. 성은 중(仲) 이름은 유(由), 자는 자로 또는 계로(季路)로 공자의 제자이다. 위(衛)나라의 전정(專政)자 공 회(孔회)의 읍재가 되어 위 첩(衛輒)을 내쫓으려는 태자 괴외( 외)의 난에 태자의 장수인 맹염(孟염)에게 죽었다. 맹염이 창으로 찔러 갓끈이 끊어지자 자로는 군자는 죽어도 갓을 벗을 수 없다라고 다시 끈을 매고 죽었다.

63) 본종(本宗)과 지자(支子)를 이르니 일가 일문(一家一門)이라는 말이다.

64) 「논어」학이(學而)편에 "신종추원(愼終追遠)"이 보이며 집주(集註)에 추원은 제사에 정성을다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65) 전천추(田千秋)를 말한다. 한 무제에게 방사(方士)를 파하여 선도를 물리칠 것을 주장하여 무제가 이에 따랐다.

66) 원 나라 사람 허형(許衡)을 가리킨다. 정주학자로서 당대를 풍미하였다. 세조(世祖)때 벼슬하여 항상 인의·윤기(倫紀)를 주하여 신임을 크게 받았다.

67) 방달(放達)이라는 말과 같은 뜻.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 내키는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68) 초사(楚辭)의 편명 굴원(屈原)의 저술이다. 사(辭)·부(賦)의 종(宗)으로 인식되어 후세의 사인(辭人)들이 경(經)자를 부쳤으니 존중하는 뜻이다.

69) 1402(태종 2)∼1487 성종 18)의 인물. 성종년간에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1455년(세조 1) 우찬성(右贊成)으로 좌익공신(左翼功臣) 등이 되고 봉원군(蓬原君)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사위 김 질(金 )에게서 들은 성삼문(成三門)등의 단종복위음모를 고변(告變)한 공으로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으니, 김 시습이 매도한데는 이유가 있다 하겠다.

70) 이정은(李貞恩)이니 태종의 증손이 되는 사람이다. 수천 부정에 봉해졌다가 후에 수천 도정(秀川都正)에 진봉되었고 종친부 도정(宗親府都正)도 지냈다. 음률과 시에 능했다.

71) 1454(단종 2)∼1492(성종 33)의 인물, 생육신의 한 사람. 세조에 의해 물가에 이장(移葬)된 소릉(昭陵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 후능) 복위 상소를 성종에게 하려다가 임사홍(任士洪) 정창손(鄭昌孫)의 무리에게 저지당하자 세상을 버리고 유랑생활로 짧은 생애를 마쳤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추강집(秋江集)과 귀신론(鬼神論)등의 저서가 있다.

72) 김시습·남효온과 친교가 있었던듯 하나 미상.

73) 1431(세종 13)∼1529(중종 24)의 인물. 김종직의 문인이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세속의 영화를 끊고, 남효온·이정은 등과 어울리며 시주(詩酒)로 생애를 보냈다.

74) 세조시대에 벼슬을 시작했고 1486년(성종 17) 양양부사로 부임했다. 이때 김시습의 나이는52세였다.

75) 묵은 솜을 넣어 만든 솜두루마기, 빈천한 사람이 입는 옷이다. 자로는 빈부따위로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공자는 그를 칭찬하여 온포를 걸치고도 좋은 호학(狐<맥0x6037>)을 입은사람과 어울려 섰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論語 子罕》

76) 진(晋)의 전장군(前將軍) 왕공이 용모·자태가 아주 아름다운 사람이었는데, 눈 오는 날 학창구(鶴창구: 학털로 만든 갓옷)를 입고 가는 것을 맹창(孟昶)이 보고서 신선이라고 찬탄한 고사(故事)가 있다. 만산의 나무가 서리에 낙엽져 얼어붙고 온천하가 백설로 뒤엎이어도 세한(歲寒)에 홀로 청청한 송백의 굳셈과 같이 지절을 굽히지 않고 정결하게 살겠다는 의사를 비유로 드러낸 것인 듯하다.

77) 뜻을 얻지 못함

78) 찬(贊)은 찬(讚)으로도 쓴다. 문체(文體)의 이름, 대체로 칭술·논평하는 글이니 잡찬(雜贊)·애찬(哀贊)·사찬(史贊)의 삼체(三體)로 나누고 있다.

79) 1480년(성종 11)∼1533년(중종 28)의 인물. 벼슬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되었다.

80) 1474년(성종 5)∼1530년(중종 25)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선구자.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눌재집(訥齋集)이 전한다.

81) 1514년(중종 9)∼1567년(명종 22)의 인물.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에 아부하여 예조판서까지 지냈으나 윤 원형의 실각으로 파직되었다.

 

(이 글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나온 '율곡전서'를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