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에 대한 책문(文武策)

 

이 글은 율곡의 문(文)과 무(武)에 대한 견해를 밝힌 내용이다.

문(問)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는 문(文)을 날(經)로 하고 무(武)를 씨(緯)로 할 뿐이다.

당우(唐虞: 요(堯)와 순(舜)이 다스리던 시대임)와 삼대(三代: 하(夏)·은(殷)·주(周)의 세왕조를 말함)는 오래되었다. <한나라 무제가> 육경(六經)을 드러내어 빛나게 하고, <한나라 문제(文帝)가> 남북군을 어루만져 위로한 것과, <당나라의 태종이> 홍관(弘文館)을 세우고 부위병(府衛兵)을 설치한 것 등이 과연 예적의 문(文)을 진작시키고 무를 단련시킨 방도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인가?

문장(文章)과 성리(性理)의 학문은 송나라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었으나 무략(武略)을 힘쓰지 않았으니, 나라의 기틀을 세운 이가 자신이 숭상하는 데만 치우쳐, 이룬 업을 지켜나갈 뿐 문무 병용의 규범에 혹시 어긋났던 것은 아닌가?

우리나라는 성스러운 임금들이 잇달아 일어나 교화(敎化)의 기구가 잘 갖추어지고 위무(威武)의 공렬이 널리 발양되어 능히 오늘의 아름다운 국가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안정이 극도에 달하자 군율이 점차 해이해졌다. 섬나라 오랑캐의 도발이 있은 뒤로는 조정에서 의논하고 처리하는 것들이 모두가 무기를 정비하여 환란에 대비하는 것에 관한 일이다. 이미 지방의 무신(武臣)에게 신칙하여 통솔의 체계를 엄하게 하였고 또 어사를 파견해서 주현(州縣) · 영보(營堡)의 무기들을 두루 검열하여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 곳에 대해서는 처벌을 하도록 하였으니, 지금의 무비(武備)가 정돈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의논하는 이는 말하기를, "국가 방위의 부탁은 실로 그 소재가 있는 것이며 병갑(兵甲)의 정예는 믿을 것이 못됩니다. 하물며 서울 성곽 밖은 본래 전권을 가지고 일을 처결하는 이가 있기 마련으로서, 검렬과 사찰을 행하는 것은 단지 방진(方鎭)을 번거롭고 요란스럽게 할 뿐이니, 이것은 방진의 기세를 위축시킬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고 하니 그 말이 과연 그러한가?

유자(儒子)들이 우러르는 이와 문장가의 사표가 되는 이들이 대각(臺閣)의 반렬에 줄을 이었고, 영명한 재능과 아름다운 자질을 가진 이들이 관학(館學)에서 양성되며, 저술하는 것으로써 시험을 보이기도 하고 강송(講誦)하는 것으로써 시험을 보이기도 하여, 유능한 사람은 장려하고 유능하지 못한 사람은 권면하니, 문교(文敎)를 숭상하는 의미가 지극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는 말하기를, "명망이 있는 준수한 선비가 되는 것은 본래 그 근본이 있는 것이며, 공부를 권장하는 제도는 단지 형식일 뿐이다. 첩괄(帖括)31)의 누습이 이미 고질화되었으니, 사장(詞章)의 화려함을 어디에 쓰겠는가? 그리고 외방에는 국토를 지키는 지방관들은 군대를 훈련하는 데는 여가가 없고, 방백(方伯)은 학교 일을 여(餘事)로 여기며 멀리 시골에 묻혀 있는 빈한한 선비는 위세에 짓눌리며 천대받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날뛰는 무관들은 의기가 양양하다. 드디어 시골에 겸손하고 공경하는 기풍이 없어지고 풍속은 다투고 사나운 습속이 많아지게 되어, 눈을 부릅떠 어른을 업신여기고 활을 당겨 원수를 보복하기까지 하니, 문치(文治)가 흐뭇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거의 바랄 수 없는 일입니다."고 한다. 그 말이 과연 그러한가?

어떻게 하면 은하(銀河)와 같은 찬란한 문장을 이룩하고, 한 시대의 인재를 고무하여, 글 잘하는 문사들도 많고, 무예에 뛰어난 무사 또한 부족하지 아니하여 풍속은 맑고 교화는 순후하며, 정치는 행해지고 교령은 세워지며, 싸우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싸운다면 반드시 이겨서, 문(文)을 날〔經〕로 하고 무(武)를 씨〔緯〕로 하는 도(道)를 능히 다하여, 문과 무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치게 되는 폐단을 없이할 수가 있겠는가?

여러 군자들은 모두가 총명하고 준걸스러운 인재들로서 또 대궐에 나와 간직한 포부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이다. 이 문과 무 두 가지에 대하여는 예전에 이미 연구한 바 있을 것이니 각자 남김없이 글로 표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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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과거공부를 말함. 당(唐)나라 제도에서 경서의 구절로 시험을 보였으므로 응시자들은 경문(經文)을 총괄해 뭉뚱그려 엮어서 기억하기 편리하게 가결(歌訣)을 만들었으니, 이것을 첩괄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