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기술잡록(諸家記述雜綠)

 

이 글은 율곡선생의 생애를 적은 「연보초고(年譜草藁)」를 비롯하여 정 홍명(鄭弘溟)의 「기암잡록(奇巖雜錄)」· 송 익필(宋翼弼)의 「구봉간첩(龜峯簡帖)」· 정 철(鄭澈)의 「송강일기(宋江日記)」· 윤 선거(尹宣擧)의 「노서기문(魯西記聞)」· 김 창협(金昌協)의 「농암문집(農巖文集)」· 허 균(許筠)의 「성소부부고(惺所覆)」· 이 식(李植)의 「택당문집(澤堂文集)」· 이 귀(李貴)의 「등대록(登對錄)」등 여러 문헌에서 율곡의 언행 · 사상 · 학술 · 경륜 등에 관한 제반 자료들을 뽑아 기록한 것이다.

 

□ 아저씨인 홍 구상(洪龜祥)은 선군자(先君子)1)에게 재종 표제(再從表弟)가 된다. 그 아우 치상(致祥)과 함께 선친한테 수업하였는데, 그가 언젠가 말하기를, "우리 형제는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선생을 모시고 수학하였는데, 선생께서 남과 더불어 사적인 이야기나 비밀스런 말을 하시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하였다. 선생께서 언젠가 학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사군자(四君子)2)가 마음을 가짐과 일을 처리하는 것은 마땅히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이 하여 남들로 하여금 모두 볼 수 있게 하여야 참으로 언행이 표리여일하다고 할 수 있다.' 하셨다." 하였다. (「연보초고(年譜草藁)」에서 나왔다.)

 

□ 일찍이 생각하건대, 한 문공(韓文公)3)이 이른바 '언행(言行)을 살피면 하자가 없고, 깊은 조예를 엿보면 한계가 보이지 않으며, 명백순수(明白純粹)하고 광휘일신(光輝日新)하다.'4)는 것은 실로 유도자(有道子)의 기상을 잘 형용한 말이다. 고금을 살피건대, 오직 율곡만이 이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계어록(沙溪語錄)」에서 나왔다. 아래도 같다.)

 

율곡이 남과 말할 때에는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고 격의없이 대화하여 남김없이 다 말해 버리고야 말았으니, 그 덕량(德量)의 웅대함을 볼 수 있다. 다만 소인들에게 모함을 당한 것도 또한 이 때문이었다.

 

□ 율곡은 문자 등에 있어 정미(精微)하고 긍경(肯경)5)한 곳은 반드시 명백하게 설파(說破)하여 비록 문리(文理)가 불통한 것이라 하더라도 모두 잘 깨달아 알았다. 구봉(龜峯)6)의 경우 분석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의 의중은 아마, '내가 비록 말한다 하더라도 남들은 반드시 알아듣지 못하리라' 고 여긴 것이다. 그 기상이 서로 같지 않았던 것이다.

 

□ 율곡이 모셔진 석담(石潭)의 사우(祠宇)를 찾아 배알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좌중에 어떤 급문지사(及門之士)7)가 있어 말하기를, "선생은 풍의(風儀)가 간결(簡潔)하고 언어(言語)가 탄탕(坦蕩)하였다. 향인(鄕人)을 접촉할 때에는 소 · 장(少長), 우 · 지(愚智)를 막론하고 각각 그들의 인망을 얻었다. 혹 사색(思索)할 일이 있으면 한참 동안 단묵(端默)하였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하였다. (「기암잡록(畸雜錄)」에서 나왔다.)

 

□ 석담(石潭)의 서신은 개봉하여 서너 번 읽어보면 심지(心知)가 크게 진취될 뿐만이 아니다. 석담 형은 남의 말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특별히 남다른 곳이 있은, 물아(物我)의 간격이 없고 기상(氣象)이 화평한 자가 아니라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구봉간첩(龜峯簡帖)」에서 나왔다.)

 

□ 숙헌(叔獻: 율곡의 자.)이 찾아왔다. 선지(先誌)8)를 박 사암(朴思菴)9)에게 보내어 산점(刪點)을 받아 와서 다시 숙헌에게 보이려 하니 매우 미안할 것 같았는데, 숙헌이 보여 주기를 자청하니 내어 보였더니, 조금도 언짢아 하는 기색이 사색(辭色)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사람의 이러한 덕을 따를 수가 없다. (「송강일기(宋江日記)」에서 나왔다.)

 

□ 우계(牛溪)10)가 일찍이 선생과 함께 화석정(化石亭) 아래에서 작은 배를 띄워 선유하다가, 갑자기 풍랑이 크게 일어서 배를 장착시킬 수 없는 위기를 만났는데, 선생은 뱃머리에서 태연스럽게 읊조리며 조망하였다. 우계가 놀란 어조로, "어찌 처변(處變)하는 도리도 듣지 못하였는가." 하자 선생은 웃으면서, "우리 두 사람이 어찌 익사(溺死)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조금 후에 풍랑이 드디어 멈추었다. (윤 선거(尹宣擧)의「노서기문(魯西記聞)」에서 나왔다.)

 

□ 성 선생11) 이 입성하던 날 마침 송강(松江)12)의 생일잔치에 가게 되었다. 선생이 뜰에 당하여 기생이 좌열에 끼어 있는 것을 보고 주인에게 말하기를, "저 기생은 오늘의 모임에 마땅치 않을 듯 싶소." 하매, 율곡이 웃으면서,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나니,13) 이 또한 하나의 도리라오,"하자, 선생은 결국 자리에 올랐다. (「우계언행록(牛溪言行錄)」에서 나왔다.)

 

□ 성 선생14)을 찾아뵈었더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는 율곡의 문전을 지나오면서도 찾아보지 않은 것은 무슨 뜻인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일찍이 납배(納拜)하지 않은 처지입니다. 사마공(司馬公)15)이 정승이 되자, 유원성(劉元城)16)은 그의 문인로서도 다시 왕래하지 않았는데, 일찌기 납배하지 않은 문전에 어찌 가볍게 들어갈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선생은 말하기를, "율곡은 지금 임하(林下)에 있으니, 이 경우와는 다를 것이다. 후일 지날 때 그의 얼굴을 한 번 보거라, 반드시 앞에 한 말을 후회할 것이다." 하였다. (우 복룡(禹伏龍)의 「동계잡록(東溪雜錄)」에서 나왔다.)

 

□ 공이 언젠가 말하기를, "매양 선생을 대하면 마치 높은 누각에 올라 팔면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 같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사벽한 마음이 없게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 산에는 풍악산을 보고, 사람에는 율곡 선생을 보았다." 하였다. (만퇴(晩退) 신 응구(申應)의 「유사(遺事)」에서 나왔다.)

 

□ 율곡은, 비록 천백 대 이후에서라도 그의 심사(心事)가 마치 청천백일과 같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농암(農巖) 김 창협(金昌協)의 문집에서 나왔다.)

 

□ 율곡선생의 모친은 바로 신씨(申氏)의 소녀였는데, 성품이 차분하고 강직하였으며, 글을 잘하고 또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다. 규범(閨範)이 매우 엄하여 언제나 여칙(女則)으로 몸을 단속하였으니, 선생의 학문은 태교(胎敎)17)에서 얻은 것이 많다. (「양천부부고(陽川覆)」18)에서 나왔다.)

 

□ 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여 큰 뜻을 가졌으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다. 7세에 이미 경서에 통하고 글을 지었으며, 조전(雕篆)19)을 일삼지 않았으나 문장이 일찍 성숙하여 이름이 사방에 알려졌다. (택당(澤堂) 이 식(李植)의 「잡고(雜)」에서 나왔다.)

 

□ 4세때 밖의 스승에게 나아가서 「사략(史略)」초권을 배우는데, '제위왕초불치제후개래벌(齊威王初不治諸侯皆來伐)'이란 대문에 이르러 스승이 잘못하여 후(候)자 아래에 구결(口訣)을 붙이니, 선군자께서 묵묵히 공수하고 살펴보면서 글을 읽지 않은 지 한참만에 말씀하시기를, "개(皆)자가 제후(諸侯)의 밑에 있으니, 문세(文勢)로 보면 마땅히 불치(不治) 아래에서 구두를 떼어야 한다." 하였다. 이를 들은 이는 탐복하였다. (「연보초고」에서 나왔다.)

 

□ 숙헌(叔獻)의 민첩함은 천품에서 얻어진 것이다. 무릇 책을 볼 때에 남과 담소하면서 두루 펼쳐보고 대강대강 마치 폭풍우처럼 빨리 보아 넘기지만 이미 그 대의를 터득한다. 그 뒤에 비록 차분히 연구한다 하더라도 의미가 더 진취되는 게 없다. 그의 스스로 한 말이 이와 같았다. (「우계문집(牛溪文集)」에서 나왔다.)

 

□ 한 노숙한 학자가 언젠가 말하기를, "소시에 율곡을 따라 산으로 놀러 갔었다. 한 곳을 지날 때 바위틈에서 물이 나오는 조그마한 샘이 있었다. 뭇 사람이 모두 모여서 그 물을 마시니, 율곡도 떠 달라 해서 마셔 보고 말하기를 '이 물은 매우 맛이 좋다'하였다. 뭇 사람은 모두 특이한 물인 줄 모르고 있었다. 율곡이 말하기를 '대개 물이 맑은 것이 좋다. 맑으면 근량이 무겁고, 탁하면 비록 진흙과 모래가 섞였다 하더라도 근량이 맑은 물에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동행하는 이들이 다투어 시험해 보니 과연 근량이 다른 물보다 갑절 무거웠다. 이에 철인(哲人)이 물(物)에 대하여 무소불통하는 것이 모두 이런 유인 것을 알았다." 하였다. (기암잡록(畸雜錄)」에서 나왔다.)

 

율곡은 남의 질의에 답하되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응구첩대하였으나 모두 이치에 맞았다. (「사계어록(沙溪語錄)」에서 나왔다.)

 

□ 율곡이 선생에게 묻기를, "형은 글을 볼 때 몇 줄을 한꺼번에 보아 내려가는지 모르겠구려." 하니, "보아 내리는 것이 7∼8줄에 불가하오." 라고 답하자, 율곡이, "나도 역시 10여 줄에 불과할 뿐이요." 하였다. (「우계 언행록(牛溪言行錄)」에서 나왔다.)

 

□ 율곡이 19세 때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계정(戒定)20)에 종사하니 생불(生佛)이 나왔다고 산중에서 떠들어댔다. 그러나 율곡은 얼마 후에 그것이 그릇된 것임을 깨닫고 돌아와서 정학(正學)에 정진하여 독신·역행(篤信力行)하였다. (택당(澤堂)의 「잡고(雜)」에서 나왔다.)

 

□ 율곡이 입산했을 때 자호를 의암(義菴)이리 하였으니, 그것은 아마 집의(集義)21)해서 호연(浩然)한 기운이 생긴다는 것에 뜻을 둔 것이리라. (「사계어록(沙溪語錄)」에서 나왔다.)

 

□ 율곡이 학문할 줄 알게 된 때에 미쳐서는 주자(朱子)의 유상(遺像)을 그려 간직하고 밤중에 반드시 일어나 의관을 정제한 다음 그 유상 앞에서 그 날에 있었던 언행에 대해 스스로 고하였다. 행실이 만일 적중하였다면 유행(遺行)에 합하였다고 고하고 만일 차실(差失)이 있다면 자신을 자책하였으니, 회옹(晦翁)의 도를 독실히 행하는 데는 대개 하루의 간격도 없었던 것이다. (병파(坡) 최 유해(崔有海) 의 문집에서 나왔다.)

 

□ 율곡이「맹자(孟子)」에서 '한 불의한 일을 행하고 한 무고한 사람을 죽여 가며 천하를 얻은 일은 하지 않는다'는 말을 표출하여 항시 자신도 힘쓰고 다른 사람도 권면하였으니, 학자들은 그것을 몰라서는 안된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문집에서 나왔다.)

 

□ 지난 달 그믐날 숙헌(叔獻)을 율곡(栗谷)으로 찾아가 보았다니, 책상 위에 「시전(詩傳)」 국풍(國風)편이 펴져 있었다. 혼(渾)이 묻기를, "금년에는 얼마나 많은 책들을 읽었나요." 하니, 답하기를, "금년에는 사서(四書)를 각각 세 번씩 읽었는데 세 번씩을 총계하면 아홉 번이 되며, 지금 또 비로소 「시경」을 읽어 왕풍(王風)편에 이르렀다오." 하였다. 혼은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감탄하였다. 나로 말하면 늘 한가한 것이 또, 집수리 하느라, 집안일 하느라, 접빈객 하느라 일이 많은 숙헌보다 나은 데도 일년 내내 한권의 책을 읽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고서 도리에 소득이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자못 퇴보하면서 전진을 도모하는 격이다. (「우계일기(牛溪日記)」에서 나왔다.)

 

□ 율곡은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 시원스럽고 투철하게 알았다. 아무렇게 말해도 조리가 분명하여 비록 나같이 우둔한 자라도 깨닫지 못할 것이 없었다. (「사계어록(沙溪語錄)」에서 나왔다.)

 

□ 퇴계(退溪)의 이기론(理氣論)에는 끝내 투철하지 못한 곳이 있다. 만일 율곡의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서로 부합했을 것이다.

 

□ '인심(人心) · 도심(道心)이 다 성(性)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주자(朱子)의 혹원(或原) · 혹생(或生)22)의 설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주자의 설은 바로 그 파류(派流)를 말한 것이고, 선생의 논리는 바로 그 원본(源本)을 추구한 것이니, 주자에 이반되지 않는다. 각기 가리킨 바가 있기 때문에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선생은 도리(道理)의 원두(源頭)를 투철하게 보아서, 전인(前人)의 말에 구애되지 않고 곧장 흉중의 자득한 것을 내놓아, 전현(前賢)이 미처 발휘하지 못한 것을 발휘하셨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포저(浦渚) 조 익(趙翼)의 문집에서 나왔다.)

 

□ 극기복례(克己復禮)23)는 「논어(論語)」의 본주(本註)에서 분명하게 설명했을 뿐만 아니라. 또 율곡선생이 조사(詔使)에게 올린 설이 극히 올바르고 자세한데, 지금 어찌 감히 군더더기 말을 다시 하겠는가. (우암(尤菴)의 문집에서 나왔다. 아래도 같다.)

 

□ 인심 · 도심에 대한 율곡의 설은 한결같이 주자를 따랐으니, 다시 의심할 것이 없다.

 

격물물격(格物物格)24)에 대해 퇴계가 초년에 논해 놓은 것은 후학이 보면 이해가 안간다. 만년에 가서 고친 설에는 더욱 의심의 여지가 있다. 주자가 「혹문(或問)」·「어류(語類)」에서 이것을 자세하게 논하였는데, 율곡의 설은 한결같이 여기에 근거하였으므로 명백 통쾌하여 의심할 게 없는 것이다.

 

□ 권 사성(權思誠)이 언젠가 그 선인인 만회공(晩悔公)25)의 말을 되뇌기를 "물격(物格)의 설에 대해서는 오직 율곡만이 주자의 뜻을 꿰뚫어 보았고, 퇴계는 종시 의심스럽다" 고 하였다.

 

□ 숙헌(叔獻)과 함께 백 참판(白參判)26)선생을 뵙고, 다음날은 성주(城主)를 주관(州館)에서 뵈었다. 함께 다니면서 숙헌이 침착하게 처신하고 올바르게 마음을 간직하여 우신 깎이는 음험(陰險)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깊이 감모(感慕)하여, 분발해서 예(禮)로써 몸을 단속해서 나의 포만(暴慢)한 결점을 다소 제거할 것을 생각하였다. (「우계일기」에서 나왔다. 아래도 같다.)

 

□ 숙헌에게서는 병이 없어 정신이 맑고 의리에 민감함을 볼 수 있으니, 그는 끝내 따를 수 없다. 또 자신있게 몸을 닦고 침착하게 사무에 응하매 기세가 자연히 커져서 남들이 경시하지 못함을 볼 수 있으니, 그에게 관작(官爵)이 찾아든 것 따위는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 율곡이 우계(牛溪)를 칭찬하여 '조집(操執)과 행실이 돈독하고 확고한 것은 내가 미치지 못할 바라' 하였으니, 이는 아마 우계의 지경공부(持敬功夫)를 지적해 말한 것이리라. 어떤 사람은 혹 이것을 가지고 율곡의 행처(行處)가 우계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의심하나, 기실은 율곡의 역행(力行)은 가장 미칠 수 없는 것이었다. 단지 성효(誠孝)가 지극하여 능히 신명(神明)에 통했을 뿐만 아니라, 무릇 사수(辭受)의 절도와 성색(聲色)의 경계에 있어서도 모두 극히 근엄(謹嚴)하여 털끝만큼의 방과(放過)함이 없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의 행처(行處)가 어찌 우계에 미치지 못했겠는가. 그리고 가정을 다스리고 대중을 거느리는 데 한결같이 옛사람을 법도로 삼았고, 규문(閨門) 안이 마치 조정(朝廷)처럼 엄숙하였으니, 아마 우계는 역시 이런 역량이 없었을 것이다. (「농암문집(農巖文集)」에서 나왔다.)

 

□ 11세 때 찬성공(贊成公)27)께서 병이 위중하시자, 선군자(先君子)28)께서 팔뚝을 베어 피를 마시도록 하고 자신이 대신 죽기를 청하기를, "저는 나이도 젊고 재주도 많으니, 능히 귀신을 섬길 수 있거니와 아버지로 말하면 나이가 늙어서 저의 재주 많은 것만 못할 것이다." 하였다.

다음날 찬성공이 소생해서 말씀하시기를, "꿈에 백발노인이 이 아이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는 바로 동국대유(東國大儒)이니, 그 이름은 옥(玉)변에 이(耳)를 붙인 글자라' 했다. 하고 드디어 그 글자로 이름을 하도록 명하셨다. (연보 초고조에서 나왔다. 청강(淸江) 이 제신(李濟臣)의 「소설(小說)」에, "군수(郡守) 이 경(李敬)이 소시에 자(字)를 숙헌(叔獻)이라 하였더니, 꿈에 신인(神人)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네가 존중할 사람의 자이니, 너는 속히 고쳐라' 했다. 그래서 숙온(叔溫)으로 고쳤는데, 그 후 동년방(同年榜)29)이 나온 뒤에 숙헌이 율곡의 자임을 알았다." 하였다.)

 

□ 선생의 중형(仲兄)30)은 본디 물정에 어둡고 어리석은 분이었다. 일이 있을 때마다 번번히 선생을 불러서 시켰는데, 선생은 이미 지위가 이상(貳相)에31) 이르렀지만 복역(服役)에 태만하지 않았다. 문생들이 말하기를, "선생의 삼달존(三達尊)32)인 신분으로서 지나치게 공손하는 게 아니십니까. 자제로 대신케 하는 것도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하니,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부형께서 나에게 분부하셨는데, 내가 어찌 감히 엄연하게 다른 자제로 하여금 노역을 대신케 하겠느냐. 대저 부형의 앞에서 지나친 공손이 예인 것이다. 뜻밖에 부여된 벼슬은 천성(天性)이 아니니, 지위의 고하는 논할 것이 아니다. 더구나 세월이 유수와 같은데, 형이 작고한 뒤에는 비록 예를 행하려 해도 행할 수 있겠느냐." (문인 이 유경(李有慶)이 찬한 유사(遺事)에서 나왔다.)

 

□ 노형(老兄)인 번이 선생에게 무엇이든지 시키면 자제들이 자리에 그들먹하더라도, 선생은 한번도 노역을 대신 시키는 적이 없었다. 종이 자르는 일, 차 올리는 일을 몸소 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지위가 이공(貳公)에 올랐으나 민첩하기가 마치 연소자와 같았다. (「감파문집(紺坡文集)」에서 나왔다.)

 

□ 중형(仲兄)인 번씨는 오활하기로 호칭이 나 있었다. 그러나 선생의 어짊을 알고 마치 부형처럼 존경하였다. 그래서 선생이 매번 외출했다 돌아오면 '오늘은 무슨 술작(述作)이 있었느냐' 고 반드시 물어서, 있으면 금방 손수 적었다. 그런 때문에 선생의 시문(詩文)이 후세에 전해진 것은 모두 그가 기록한 것이다. (「노서기문(魯西記聞)」에서 나왔다.)

 

□ 선생의 서모(庶母)가 남다르게 패악(悖惡)하였으나. 선생은 존경심과 효심을 일으켜서 끝내는 즐거워하도록 만들었다. 선생이 언젠가 손님을 대하고 앉았을 대 어떤 사람이 홍시(紅枾) 한 쟁반을 드린 일이 있었다. 선생은 손님이 시장한 듯 해서 한 개를 손님에게 주고 또 자신이 한 개를 가져 유식(侑食)하고는 안에 들여보냈더니, 서모가 두 개가 비어 있는 자국을 보고 크게 꾸짖기를, "이토록 먹고 싶었으면 무엇하러 들여보냈느냐."하였다. 선생이 빨리 홍시 두 개를 취해 가지고 들어가서 사죄하기를, "찾아 온 손님이 시장한 기색이 보이기에 지레 주었던 것인데, 제가 과연 잘못하였습니다." 하자, 서모는 드디어 노여움을 풀고 먹었으니, 이것이 그 하나의 일이다. (「우암문집」에서 나왔다.)

 

□ 가정에 처해 있을 때에는 고래(古禮)를 준수하였다. 음식을 들 적에 때로는 남녀가 나누어 앉았으며 음식은 고르게 나누어주었고 자리 순서는 반드시 나이에 따라 정하여 질서가 정연하였다. 노복(奴僕)들이 먹는 음식도 반드시 물에 씻어 깨끗이 하게 하였고 자제들로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감파문집」에서 나왔다.)

 

□ 규문(閨門)이 관부(官府)와 같아 한 방에 모여서 식사를 한다거나, 현가(絃歌)불며 노는 자리에도 다 예절이 있었다. (「택당잡고(澤堂雜)」에서 나왔다.)

 

□ 우리나라의 선현(先賢)에 퇴계 · 율곡 같은 분이 다 고조(高祖)에게 제사 지냈다고 한다. (「의례문해(疑禮問解)」에서 나왔다.)

 

□ 전번에 가형(家兄)의 편지를 받아보니, 형께서 앞으로 나에게 녹봉을 나누어 줄 것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형께서 관직에 오래 머물려는 심산입니다. 생각하건대, 형은 공연히 녹이나 받아 먹느 사람이 아니니, 전일의 편지에서 이른바 '성의를 쌓아 천심을 돌이킨다.' 는 그 날이 아마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온 나라가 소생할 터인데, 어찌 단지 병든 나에게 녹봉을 나눠 주어 구차하게 살리는 은혜만을 베풀게 될 뿐이겠습니까. (「구봉간첩」에서 나왔다.)

 

□ 선생께서 일찍이 황해감사로 계실 때의 일이다. 순시차 황주(黃州)에 이르니, 젊은 기생 유지(柳枝)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사인(寺印)의 딸로서 16세가 채 못되었는데 자색(姿色)이 있었다. 그녀가 방기(房妓)로 와서 모셨으나 정욕의 느낌은 없었다. 그 뒤에 선생이 혹은 원접사(遠接使)33)로, 혹은 누이를 뵙는 일로 황주를 왕래하면, 유지가 꼭 방에 있어 모시고 자기를 원하였다. 선생은 촛불을 밝혀서 그를 가까이하지 않고 사(詞)를 지어 정(情)을 말하였으니, 그 남과 사이좋게 어울리나 유탕하지 않으심이 이와 같았다. (이 유경(李有慶)이 찬한 「유사」에서 나왔다. 아래도 같다.)

 

□ 석담(石潭)에 계실 때 선생은 점심을 드시지 않았다. 자제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양식이 떨어져서 하루 한 까만 먹으려 한다." 고 답하였다. 얼마 후에 최 입(崔)이 재령(載寧)의 원으로서 쌀말이나 보내 주었는데, 선생은 받지 않았다. 자제가 묻기를, "양식이 떨어진 상태에서 쌀을 거절하시니, 이유가 있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국법에 장죄(贓罪)34) 가 매우 엄하여 받는 자도 처벌이 동일하다. 우리나라 수령은 국곡(國穀)이 아니고는 다른 물건이 없다. 대저 수령이 주는 것은 모두 받아서는 안된다. 최 입지(崔立之)는 소시(少時)적 벗이니, 만일 자가의 사물로 구제해 준다면 어찌 받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하였다.

 

□ 율곡이 부제학(副題學)으로서 파평(坡平)에 물러나 쉬고 있을 대 최 해성황(崔海城滉: 해성은 봉호임)이 지나는 길에 율곡을 찾아뵈었다. 밥상을 대하니 반찬이 너무도 초라하였다. 해성이 젓가락을 대지 못하고 말하기를, "어떻게 이런 빈한한 생활을 참아 내십니까." 하니, 율곡은 말하기를, "느지감치 먹으면 맛없는 줄을 모른다오." 하였다. (「창랑우언(滄浪寓言)」에서 나왔다.)

 

□ 숙헌과 함께 화석정(花石亭)에 올랐는데, 그 집은 새로 지은 것으로 아직 가옥의 구조가 제대로 구성되지 않았다. 숙헌이 여기에 온 목적은 본래 전원(田園)을 널리 개간한 다음 종족(宗族)을 전부 모아 함께 살 계책을 하려고 한 것이었는데, 일은 뜻과 같지 되지 않아, 가업(家業)이 영락(零落)하여 죽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련하다. 지금 시대에 이와 같은 사람도 있는데, 그로 하여금 궁곡(窮谷) 속에서 빈한한 생활을 하도록 하니, 세도(世道)를 알 만하다. (허 봉(許)의 「조천록(朝天錄)」에서 나왔다.)

 

□ 근세에 모재(慕齋)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여주(驪州)에 살 때 수확하는 장소에 친히 가서 일을 감시하되 싸라기 한 톨도 마당에 유실되지 않게 단속하면서, "모두가 천물(天物)35)이다."고 하였다.

율곡선생은 해주(海州)에 살 때 대장간을 차리고 호미를 만들어서 그것을 팔아 생활을 하였다.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면 대인(大人)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것을 하였다. (백사(白沙) 이 항복(李恒福)의 문집에서 나왔다.)

 

□ 「소학집주(小學集註)」의 발문(跋文)에서, "나의 벗인 덕수 이후 숙헌(德水李侯叔獻)이 벼슬을 내놓고 돌아가 해산(海山)의 양지쪽에서 도(道)를 강설할 때 선비를 양성하는 규칙이 모두 거행되어 법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소학」책을 내걸어서 덕(德)에 들어가는 문을 삼았던 것이다." 하였다. (「우계문집」에서 나왔다.)

 

□ 여러 동학들에게 「소학」을 숭상하도록 권유하며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그대들은 보지 못했나 주문공의 「소학」책을, 君不見朱文公小學書

여기에서 마음을 수렴하고 성품을 함양하는 것이라네. 收心養性之所於

강령이 분명하고 절목이 갖춰졌으니, 綱領昭昭節目備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소학」을 뒤로 미루겠나! 若欲爲人其後諸

근대 덕수에 명결이 있어, 邇來德水有明訣

반드시 영재들로 하여금 이 책을 먼저 읽게 하였다. 必使英才先是書

훈풍에 준재들이 변화됨을 거의 볼 뻔하였더니, 薰風庶見乂變

중도에 작고하시매 슬프기만 하여라. 半途云亡可

 

(문인인 중봉(重峯) 조 헌(趙憲)의 문집에서 나왔다.)

 

기묘년(1519)에 동인(東人)이 뜻을 이루어 국사를 농간하자, 선생은 도가 행해질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후생들을 교도하는 것으로 여생을 마칠 계책을 삼았다. 조 헌(趙憲) · 김 장생(金長生) · 이 귀(李貴) · 유경(李有慶) · 홍치상(洪致祥) · 조 광현(趙光玹) · 최 전(崔澱) · 허 극심(許克諶) · 김 광운(金光運) · 홍 천경(洪千璟) · 이 배달(李培達) · 강 해(姜海) 등이 정사(精舍)로 모였고, 고을의 학도 및 사방 이웃 고을 선비로서 소문을 들은 자들이 모여드니 학궁(學宮)이 수용할 수가 없었다. 강수(講授)의 여가에는 학도들과 산수(山水)에 노닐기를 즐겼으니, 수양산(首陽山)의 장선동(藏仙洞) · 잠양동(潛陽洞) · 승선암(昇仙巖)이나 서해(西海)의 호연정(浩然亭) · 아랑포(阿郞浦)등과 같은 곳이 모두 유상(遊賞)한 장소였다. (「연보초고」에서 나왔다.)

 

□ 율곡의 서속(庶屬) 중에 한 연소한 자가 서재에 와서 놀다가 귀중한 기구를 슬쩍 훔쳐 가니, 자제가 그를 내쫓았다. 열흘이 지난 뒤에 율곡이 그 사람을 다시 불러서 처음처럼 대하니, 자제는 그것을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율곡은, "저 애가 반드시 허물을 고쳤을 것이니, 영원히 버릴 일이 아니다."고 하였다. (「창랑우언(滄浪寓言)」에서 나왔다.)

 

□ 유공 홍(兪公泓)이 감시고관(監試考官)이 되었을 때 율곡 이 문성공을 얻어 장차 많은 인재들 위해 앉히려 하자, 혹자가 그의 소시 적에 선(禪)을 배운 것을 혐의로 여겼다. 유공이 말하기를, "초학(初學)의 잘못은 정주(程朱)도 면하지 못한 바다. 이제 그는 이미 정도로 돌아왔는데, 또 무엇을 허물 하랴." 하니, 의논이 드디어 정해졌으므로, 식자(識者)들은 그를 위대하게 여겼다. (계곡(谿谷) 장 유(張維)의 문집에서 나왔다.)

 

□ 이 율곡이 옥당(玉堂)에 있을 때 왕이 마니산(摩尼山)의 초청사(醮靑詞)36)를 지으라고 명하자, 공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전하께서는 그것이 좌도(左道)37)임을 이미 알고서 감히 강제로 간관(諫官)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못하시고, 곧 소신에게 명하시니, 이는 간관은 좌도로써 임금을 섬길 수 없는데, 강관(講官)은 오히려 좌도로써 임금을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였으니, 이는 정말 유자(孺子)의 말이다. 만일 율곡이 아니라면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지봉(芝峯) 이 수광(李光)의 「유설(類說)」에서 나왔다.)

 

교리(校理) 이 이(李珥)가 「근사록(近思錄)」을 가지고 와서 의심나는 곳을 물었는데, 석강(夕講)에 이르러 나의 말을 많이 사용하였으니, 참으로 온화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미암일록(眉巖日錄)」에서 나왔다. 아래도 같다.)

 

□ 경오년(1570) 5월 25일 정사(政事)에서 이 이(李珥)가 교리(校理)이 수망(首望)38)에 들어 낙점(落點)39)을 받았다. 이 이가 일찍이 독서당(讀書堂)의 삭계(朔計)40)에서 「동호문답(東湖問答)」41)을 지어 정 순붕(鄭順朋) 등 다섯 간인(姦人)의 죄를 극도로 진술하였고, 또 언젠가 영상(領相) 이공(李公)42)이 을사년(1545) 충현(忠賢)들이 피살된 꼬투리를 약간 말한 데에서 극력 논쟁하여 위공(僞功)을 마땅히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와서 상(上)이 이 이를 발탁하여 경악(經幄)43)에 둔 이유는 아마 그 골경(骨)44)을 가상히 여기어 그의 말을 시행하려고 한 것이리라.

 

□ 6월 초아흐렛날 우중(禹中)45)에 교리, 이 이가 지은 차자(箚子)(글은 잃어버림.)를 가지고 들어갔다. 그 차자 가운데에, "환관(宦官) · 궁첩(宮妾)은 혹 위엄에 협박당하기도 하고 혹은 이끗에 유인되기도 하여 시비가 분명치 못한 것이 있는데, 전하께서는 그 말을 받아 들여 지의부단(遲疑不斷)하시는 게 아닙니까. 전하의 성명(聖明)으로서는 필시 이럴 리가 업을 것이지만 신등은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라는 말이 있었는데, 상이 답하기를, "어찌 이런 무리한 말이 있는가. 막대한 일에 어찌 부시(婦寺)46)가 간여할 수 있겠는가. 옥당학사(玉堂學士)는 고인의 글을 읽었는데도 오히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하였다.

 

□ 신이 이 이를 사사할 때 언젠가 묻기를, "경연관(經筵官)은 부복(俯伏)하여 임금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습니까." 하였더니, 이 이는 말하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나의 경우는 일을 아뢸 때 임금의 얼굴을 우러러 본다."고 하였습니다. (사계(沙溪)의 「연석문대(筵席問對)」에서 나왔다.)

 

□ 숙헌(叔獻)이 서울에 있는 집을 팔면서부터 벼슬을 사퇴할 생각이 더욱 굳혀졌다. 성리(聲利)의 바다 속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머리를 디밀었다 하는 그런 자에 비하면 그 거리가 어찌 백천만 리 뿐이겠는가. (「송강일기(宋江日記)」에서 나왔다.)

 

□ 사간원의 차자에, "국가는 인재로 근본을 삼고, 임금은 어진 이를 등용하는 것으로 주무를 삼으니, 국가는 인재가 아니면 집을 짓는 데 재목이 없는 격이고, 임금이 어진 이를 등용하지 않으면 물을 건널 때 노[楫]를 버리는 격입니다. 신 등이 삼가 보건대, 직제학 이 이는 옛 것을 좋아하여 힘써 배운데다 행실은 바르고 말씨는 곧아서, 그 간직한 경륜이 결코 범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번 신병으로 인하여 오랜 동안 전야(田野)에 있다가 지금 특별히 비상한 명을 받고 궐하에 사은하였습니다. 하물며, 그 상소 사연은 시폐(時弊)를 적중시켰음에라까. 오늘날 측석(側席)47)의 구현기(求賢期)를 당하여 마당히 그 난진이퇴(難進易退)의 절의를 포상해서 옥당(玉堂)에 머물게 하고 논사건구(論思建救)의 임무를 책임지웠어야 할 것인데, 당초 진주(晋晝)의 접견48)이 없었고 종당 곡구(谷駒)의 만집(挽執)49)을 인색히 하였으니, 신등은 매우 민망합니다." 하였다. (청강(淸江) 이 제신(李濟臣)의 문집에서 나왔다.)

 

□ 갑술년(1574) 정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 이 이(李珥)가 만언소(萬言疏)를 올리니, 상(上)이 특별한 비답을 내리는 동시에 그를 기꺼이 받아 들였다. 정원(政院)이 아뢰기를, "신 등이 이 이의 상소에 답한 비답을 삼가 보매, 기꺼이 받아 들이신 성의와 몸을 닦고 마음을 살피신 뜻이 말씀 표현에 넘치고 있으니, 감격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이 상소의 사연은 1언(言)·1구(句)가 모두 빈 말이 아니고 시대의 병폐를 적중한 것입니다. 상께서 집무의 여가에 비록 혹연 한두 차례보신다 하더라도 항상 유념하여 살피시지 못할듯 싶습니다. 그러니 한 통을 쓰게 하여 좌우에 두고 날마다 살펴보신다면, 마음을 다스리고 학문을 하는 요령과 백성을 소생시키고 폐단을 개혁하는 책략이 다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를 받아 들였다. (「미암일록(眉巖日錄)」에서 나왔다. 아래도 같다.)

 

□ 영의정 이공 탁(李公鐸)에게 가서 얘기 하다가 이 승지(李承旨)50)의 만언봉사(萬言封事)에 언급하여 서로 찬미하면서 '경륜(經綸)의 재주가 있으니, 마땅히 그의 계책을 도와 성취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 비현합(丕顯閤)에서 인견(引見)하였다. 강(講)을 마치고 나아가 아뢰기를, "전일 이 이의 소(疏)에 대한 상의 비답 내용은 극도로 장허(奬許)한 것이었습니다. 신은, 오늘날의 굉강(宏綱) · 급무(急務)는 이 이의 소에서 이미 다 다루었으매, 이 이는 바로 시무(時務)를 아는 자요, 물정에 어두운 서생(書生)과는 같지 않으니, 진실로 채용(採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만일 이 이의 소를 인하여 공물(貢物) · 선상(選上)51) · 군정(軍政)의일을 강구해서 시행한다면 백성의 곤고를 소식(蘇息)시킬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하였다.

 

□ 김 우옹(金宇옹)이 아뢰기를, "백관 가공법(百官家供法)52)은 의심없이 행하기를 청합니다."하였다. 전례에 백관들이 관부에 나앉으면 관가에서 음식을 제공하였으므로 국가 재용이 크게 소모되고 담당 노복이 짜증을 냈다. 그래서 이 때 백관들로 하여금 스스로 음식을 조달하게 하기를 청한 것이다. 이 이(李珥)가 이 논의를 주창한 것인데, 끝내는 행해지지 않았다. (「택당잡고」에서 나왔다.)

 

□ 한 통의 편지를 써서 율곡으로 하여금 사은(謝恩)의 행차를 멈추게 하려고 했다. (황해감사 때임.) 편지 내용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고명(高明)의 거취에 대해서 감히 논의할 수 없거니와, 그러나 명의(名義)가 없는 듯하고, 또 전일의 소의(疎意)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소." 율곡은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여 번복하지 않았다. 그는 소견이 너무도 출중하기 때문에 남의 말을 믿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뒤에 답서하기를, "능히 자신을 극복하여 충고를 따르지 못하니 부끄러워 마지 않소." 하였다. (「송강일기(宋江日記)」에서 나왔다.)

 

□ 주강(晝講)53)에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선(善)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오나 성의가 혹 지극하지 못합니다. 이 이 같은 이는 오랫동안 유악( 幄)54)에 있었으니, 전하께서도 그 위인을 아실 것입니다. 학식이 있고 재간이 있어, 비록 허소한 곳은 있지만 그 재구(材具)는 크게 쓰이기에 알맞으니, 오늘날 뭇 신하들 중에 그와 비견할 자가 적습니다. 만일 그를 임용하되 그의 역량을 다 발휘케 못한다면, 신은 후세의 한탄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김 우옹(金宇])의 경연강의(經筵講義)에서 나왔다.)

 

□ 간원(諫院)이, 황주 판관(黃州判官) 최 세해(崔世瀣)가 관고(官庫)를 탕진했다고 파직을 청하여 임금의 윤허를 얻었는데, 방백(方伯) 이 숙헌(李叔獻)55)은 곧 척간(擲奸)56)하게 하매, 관물(官物)이 가득 쌓여 원래 수량보다 많았으므로 곧 최 새해의 선정(善政)에 대한 상황을 진언하고 끄트머리에, "대간(臺諫)의 말 한 마디 잘못으로 백천 마다의 직언(直言)들이 모두 헛되이 되었고, 지금 신의 한 마디 말은 성상께서 대간을 경시하시는 습성을 더 자라게 하였으니, 신의 직을 파면하여 대간의 체모를 존중하소서." 라고 말을 맺었다. (「송강일기」에서 나왔다.)

 

□ 완평 이공(完平李公)57)의 행장에, "갑술년(1574) 크게 병정(兵丁)을 편성할 때 공은 황해도사(黃海都事) 겸 경차관(敬差官)으로 선발 제수되었다. 관찰사 이 문성공(李文成公)58)이 그의 재주를 기특하게 여겨 날마다 맞이해서 곁에 앉히고 말하기를 '그대의 본직은 어디까지나 도사니, 모름지기 먼저 나를 도와 문서(文書)와 적병(籍兵)에 관한 사무를 다스려야 한다.'하고 집무 중 여가가 날 적마다 모든 중요한 일들을 곧 공에게 물어서 재결했다."하였다. (「택당문집(澤堂文集)」에서 나왔다.)

 

□ 율곡이 이조 참의로 있을 때의 일이다. 이 발(李潑)이 좌랑(佐郞)으로서 조 중봉(趙重峯: 조 헌)59)을 크게 쓰고자 하여 율곡에게 말하기를, "여식(汝式)은 쓸려면 크게 쓰고 그렇지 않으면 놓아 두고 불문에 붙이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여식은 비록 경제 대지(經濟大志)는 가졌으나 재주가 미치지 못하고 너무 고집스럽다. 시세(時勢)를 헤아리지 않고 갑자기 삼대(三代) 적 정치로 임금에게 기대하다가 뜻과 같이 되지 않을 경우는 필시 견거절함(牽折檻)60)의 환이 있을 것이다. 그대는 여식과 이미 심교(心交)61)가 되는 사이인데 한갓 급급하게 발탁하는 것만을 능사로 삼으면, 여식에게 이익은 없고 도리어 해가 있을 것이다. 들으매, 여식은 지금 독서중이라 하니, 5∼6년 더 학문이 성취됨을 기다린 뒤에 써도 늦지 않다. 그대는 깊히 생각해 보라." 하매, 이 발은, "어릴 때부터 글을 읽어온 여식에 대해서도 공의 말이 오히려 이와 같으니, 원래부터 글을 읽지 않은 우리 무리와 같은 것이 어찌 하루인들 벼슬에 있을 수 있겠소." 하고, 사퇴하려 하자, 율곡은 능히 말리지 못하였다. 이 발은 중봉을 대간(臺諫)·시종(侍從) 등 제망(諸望)에 연달아 주의(注擬)62)하였다. (「우산문집(牛山文集)」63)에서 나왔다.)

 

□ 소재(蘇齋)64)가 연석(筵席)에서 율곡을 세 번이나 천거하였다. 어느 날은 임금이 현재(賢才)를 물으니, '이 이(李珥) · 허 엽(許曄)이다' 대답하였고, 어느 날은 이 이를 크게 쓸 만한 자라고 천거하였으며, 어느 날은 임금이 대제학(大提學)을 삼을 만한 자를 묻자, 이 이 · 이 산해(李山海)·구 봉령(具鳳齡)을 천거하였다. (월정(月汀) 윤 근수(尹根壽)의 「만록(漫錄)」에서 나왔다.)

 

□ 이 이가 이조 판서로 있을 때 일국의 재상(宰相) · 명사(名士)·포의(布衣)65)들이 모두 그의 집에 찾아가서 혹은 예(禮)를 묻기도 하고 혹은 서(書)를 묻기도 하는 바람에 야심한 뒤에야 저녁밥을 먹었다. 그의 아우인 우(瑀)가 이 이에게 말하기를, "요즘처럼 허다한 빈객들을 접견하시다가는 건강을 해칠 것인데 어떡합니까."하자, 답하기를, "빈객을 싫어한다면 석담(石潭)에 있는 것이 옳다. 나는 바로 전형(銓衡)66)의 직을 맡은 사람이니, 사람을 만나 본 뒤에야 전형할 수가 있다. 이 직임은 빈객을 싫어하는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들을 만나본 연후에 각각 그들의 재주를 쓸 것이다. 만일 벼슬 구하는 사람을 싫어한다면, 과거에 달려가는 선비들이 다 벼슬 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만나 보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그리고 듣고 보는 대로 인재의 고하를 별도로 한 책에 적어 두었다가 인사 행정에 임할 때에는 작은 책에 등초해 가지고 갔다. (문인 이 귀(李貴)의「등대록(登對錄)」에서 나왔다.)

 

□ 율곡이 전형을 맡았을 때 구봉(龜峯)67)이 약간의 사람을 열서(列書)하여 추천하니, 율곡은 창문 사이에 붙여 두었다. 내가 가서 보고 크게 놀라 제거하기를 청했더니, 율곡은, "이것이 뭐 해로운가. 인재를 범연히 논하는 일은 바로 이천(伊川)68)의 사양하지 않은 바다." 하였다. (「사계어록(沙溪語錄)」에서 나왔다.)

 

□ 영상(領相) 박 순(朴淳)이, 낭관(郎官)69)의 권한이 막중하다 하여 탑전에서 아뢰어 이조 낭천(吏曹郎薦)70)을 없애기를 청하였다. 이 때 이 이가 이조판서로 있었는데도 오히려 감히 당하청망(堂下淸望)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도로 낭관에게 위임하였다. 그런 때문에 낭천은 비록 없어졌다 해도 낭관의 권한은 지금까지 빼앗지 못하였다. (이 귀의 「등대록」에서 나왔다.)

 

□ 선대부(先大夫)께서 말씀하시기를, "계미년 인일(人日)에 남봉(南峯) 정지연(鄭芝衍)은 우상(右相)으로, 이 율곡선생은 행병판(行兵判)71)에 대제학(大提學)으로 관각 제공(館閣諸公)들과 함께 반궁(泮弓)72)에 가서 제생(諸生)들을 시험보였다. 느지막에 내가 여러 소년들을 따라 제공들의 과차(科次)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 때 병부 부첩(兵部簿牒)에 대신에게 복계(覆啓)73)를 여쭈어야 할 것이 있어, 녹사(綠事)74)가 갑자기 정 정승의 자리 앞에 나아갔다. 정 정승은 평소 눈병을 앓아서 항시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오히려 부채를 들어 휘둘렀다. 율곡은 자리가 매우 멀리 덜어져 있었는데도 바라보고는 즉시 한 손에 필연(筆硯)을 들고 한 손으로 문부(文簿)를 가지고서 나아가 사과하기를 '소인이 한참 과차(科次)에 분주하므로 소리(小吏)가 잘못 스스로 오게 된 것이니, 황공한 마음 그지 없다, 하였으나, 정 정승은 사의를 표명하는 말 한 마디 없고, 단지 '읽으라'고만 말했고, 다 읽으니, 도, '붓을 가지고 써라' 하고는 입으로 복계의 사연을 불러 주었다. 율곡은 다 쓰고 또 그를 위하여 한 번 읽고 나서는 다시 필연과 문부를 가지고 물러나서 하리에게 주었다. 대개 옛적에는 비록 숭품 재상(崇品宰相)이라 하더라도 상신(相臣) 앞에선 자칭 소인이라 하고 설설 기었는데, 지금은 그런 예를 다시 보지 못하겠다." 하였다. (분서(汾西) 박 미(朴彌)의 「집기(輯記)」에서 나왔다.)

 

□ 율곡이 경연에 들어가서 군사 10만 명을 양성하고자 청하니, 서애(西厓)가75) 그것을 저지하고 물러 나와서 율곡에게 말하기를, "지금은 태평시대이니, 경연에서 권면할 일은 마땅히 성학(聖學)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고 군사의 일은 급무가 아니거늘, 공이 어떤 소견이 있기에 우리들과 상의도 않고 이처럼 지레 진달하였소." 하니, 율곡은, "속유(俗儒)가 어찌 시무(時務)를 알겠는가." 하고, 웃기만 하면서 답하지 않았다.

아계(鵝溪)76)가 말히기를, "이현(而見)이 잘못이오. 숙헌(叔獻)이 어찌 소견이 없겠소." 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묵묵히 있었다. 율곡이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제군들은 어찌 한 마디씩 말을 하여 그 가부를 정하지 않소." 하니, 동강(東岡)77)이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들이 감히 논할 바 아니오. 알지 못하면서 말하는 것을 옛 사람이 어떻게 여겼소." 하자, 아계가 말하기를, "숙부(肅夫)는 근신군자(勤愼君子)라 할 수 있소." 하고, 서로 농담하고 웃으면서 파하였다. (「우산문집(牛山文集)」에서 나왔다.)

 

□ 계미년(1583) 5월에 서얼(庶孼)과 천예(賤隸)들에게 벼슬길을 터주고 양민이 되게 할 일에 대하여 복명하였다. 자력으로 장비를 갖춰 가서 만 3년동안 변방에서 수자리를 산 자에게는 벼슬길을 터주고 양민이 되게 해주었으며, 또 서얼이 변방에 쌀을 납입할 경우에도 또한 벼슬길이 트이고 양민이 될 수 있었는데, 첩자(妾子)와 천첩자(賤妾子)의 납입하는 바에는 차등이 있었다. 모(某)는 또, 병조 군사의 궐번 속포(闕番贖布)78)를 누고(庫)에 쌓아 두어, 관원들은 그것을 마치 사장(私藏)처럼 보아 물 쓰듯 하고 있는 반면에, 변방으로 수송되어 군사의 복장이 될 사섬시(司贍寺)에 저장된 베는 곧 떨어져 가는 것을 보고, 그 속포를 모조리 변방으로 수송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군자감(軍資監)에 저장된 베로 전사(戰士)의 옷을 충당하고, 백관들의 녹봉을 덜어서 수자리 사는 군사들 처자의 양식으로 공급하기를 청하였다.

이래서 수자리 사는 군사가 남아 돌고 내지(內地)의 징발이 많지 않았으며, 변방의 양식은 요족하게 조달되고 새상 원곡(塞上原穀)79)은 줄어들지 않았으므로 사졸들은 모두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어서 집생각을 잊었다. 그리고 또 상벌을 분명히 하니, 진보(鎭堡)의 장졸들은 점차로 적군을 향하여 적을 죽여갔다. 그래서 6진(六鎭)80)이 다시 안정되고 번호(藩胡)81)가 다시 반란하지 못한 지 20여 년이 되니, 이는 대개 모가 한때 조치를 잘한 효험인 것인데, 논자(論者)는 오히려 나라를 병들게 했다고 공격한다. (「택당잡고」에서 나왔다.)

 

율곡이 벼슬에 오른 뒤에 무릇 국가 중대사가 있으면 그 누이에게 물었다. 계미년 북방 변란 때 율곡이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군량의 부족을 걱정하자, 그 누이가, "오늘날의 급선무는 반드시 인심이 즐겨 따를 것을 생각해서 행하여야 성취할 수 있다. 재주있는 서얼들이 폐고(廢錮)된 지 이미 백년이 넘어서 모두 울분을 품고 있으니, 지금 만일 그들에게 곡식을 납입함에 따라 벼슬길을 틔워 준다면 군량을 금방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율곡은 탄복하고 즉시 계청해서 시행하였다. (「기암잡록(畸雜錄)」에서 나왔다.)

 

□ 계미년에 북병사(北兵使) 이공 제신(李公濟臣)이 방호책(防胡策) 20조목을 올리니, 상이 2품 이상이 모여서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비국(備局)의 모든 재신(宰臣)이 다 모였는데, 선군자는 군병에 관한 급무로 병조에 앉아 미처 참석하지 못하였다. 당시 서애(西厓) 유 성룡(柳成龍) 또한 중망(重望)이 있었으므로 임금으로부터 '양현(兩賢)'이란 말씀이 있었는데, 이때 서애는 도승지로서 또한 그 자리에 참여해 있었다. 삼공(三公)이, 붓을 들어 회계(回啓)의 초안을 잡도록 하였으나 서애는 곧 붓을 대지 못하였고, 좌우에서도 한 마디 말을 하지 못하였다. 해는 이미 중천에 솟았고, 중사(中使)82)의 재촉하는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영상인 사암(思菴) 박공(朴公)83)이, "시급한 일이 이렇게까지 천연시키니 매우 미안한 일이오. 병조 판서를 청해 와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모두들 좋다고 응낙하였다.

선군자는 자라에 들어가 곧 서리 한 사람에게 명하여 초주지(草注紙)84) 한 권을 연달아 붙이게 하고, 또 한 사람으로 하여금 먹을 갈도록 하고는, 이에 붓을 쥐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씀하기를, "각각 생각한 바를 진술해 주시오. 마땅히 말씀하는 대로 따라 적겠소." 하매, 모두가, "우리가 만일 할말이 있었다면 어찌 병조 판서를 청하였겠소." 하였다.

선군자는 부득이 조목에 따라 논열(論列)하고 가부를 변석하여 잠깐 동안에 다 적었다. 좌우가 돌려 보되 한 마디 말이 없었고, 삼공이 두루 보고도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나아가 아뢰었다. 상이 보고, "이는 병조판서가 한 것인가?" 물었다.

사암은, 물러 나와서 일기에 쓰기를, "누가 율곡의 뜻은 크고 재주는 소활하다고 했는가. 그 재주를 써 보지도 않고 소활하다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 나는 그의 조처한 것을 보니, 아무리 극난한 일이라 하더라도 조용히 행하되 마치 구름이 공중을 지나가듯이 하여 흔적이 있지 않으니, 참으로 이른바, 세상에 드문 자질인 것이다." 하였다. (「연보초고」에서 나왔다.)

 

□ 계미년에 배로 해주(海州)로 내려가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사방 먼 산엔 모두 먹구름인데 四遠雲俱黑

중천엔 햇볕 정말 밝구나 中天日正明

외로운 신하 한 줌 눈물을 孤臣一淚

한양성을 향하여 뿌리누나 灑向漢陽城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이 간절하다. 또 다음과 같은 시도 지었다.

 

풍진에 시달려 반백이 되었는데 風塵局促二毛生

일엽편주로 돌아오니 만사가 가볍다 一韋歸來萬事輕

강상 청산 서로 싫지 않으니 江上靑山不相厭

세간의 교도는 무정도 하여라 世間交道在無情

 

상시탄속(傷時歎俗)의 뜻이 깊다. (「우산잡록」에서 나왔다.)

 

□ 계미년 이전에는 동·서가 모두 사류들의 다툼이었기 때문에 율곡이 매양 보합론(保合論)을 피력하였지만, 계미년 이후에는 사(邪)와 정(正)이 나뉘어 두당이 되었다. (「사계어록」에서 나왔다.)

 

□ 선묘(宣廟)가 이미 「강목(綱目)」85)을 하사하도록 명하고, 이어 옥당(玉堂) · 서당(書堂)의 인선을 재촉하였다. 율곡이 막 문형(文衡)86)을 맡아 있어 실제 이 일을 주관하였다. (임오년에 재신(才臣)을 뽑아 그로 하여금 강독(講讀)을 전적으로 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도록 명하니, 선생이 봉교(奉敎) 이 항복(李恒福) · 정자(正字) 이 덕형(李德馨) · 검열(檢閱) 오 억령(吳億齡) · 수찬(修撰) 이 정립(李廷立) · 봉교 이 영(李嶸)으로 선발에 응하매, 상이 내부(內部)87)에 비장(秘藏)한 「강목」을 각각 하사하였다.)

 

□ 계미년 후에는 조정 의논이 두 갈래로 갈라져서 가부가 결정되지 않았다. 명보(明甫)88)는 후배로서 명성이 자자하였고, 나 또한 얕은 지식이 있었으므로 함께 선발에 응할 희망이 있었다. 한 재상이 밤에 율곡을 찾아와서 곁에 있는 사람들을 다 물리치고 나서 말하기를, "양리(兩李)89)가 과연 인망이 있으나 의향을 모르니, 가벼이 천거하여 시사를 그르치게 만들어서는 안되오."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두 사람은 명성이 바야흐로 성한데 어떻게 그 어짊을 가리울 수 있소. 또 사람을 천거하는 데는 인재를 얻는 것이 제일이거늘, 어찌 의향을 논하겠소." 하였다. 그 사람이 야심하도록 다투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백사문집(白沙文集)」에서 나왔다.)

 

서익(徐益)이 순무어사(巡撫御史)로 관북에 가게 되니, 상이 이 이에게 나아가 변방에 관한 일을 묻게 하였다. 그 자제가 '병이 조금 차도가 있는 중이므로 노동하는 것이 마땅치 않으니 응접하는 일을 사양하시라'고 하니, 이 이는 말하기를, "이 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한 것일 뿐이다. 이 일로 인하여 병이 가중된다 하더라도 역시 운명이다." 하고, 입으로 여섯 조목의 방략을 불러 주었다. 다 쓰고 나니, 기색(氣塞)하였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그 이튿날 작고하였다. (「택당잡고」에서 나왔다.)

 

□ 병중에 있을 때 증세가 위중하므로 항상 물건에 기대려고 하였다. 문인이 자신의 몸에 기대기를 청하니, 선생은 이르기를,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시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바가 아니니, 그래서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감파문집(紺坡文集)」에서 나왔다.)

 

□ 선생이 어릴 때, 꿈에 상제(上帝)를 뵈오니, 금자(金字)로 된 장자(障子) 하나를 주므로 열어 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었다.

 

용 돌아간 새벽 골엔 구름 아직 젖었고 龍歸曉洞雲猶濕

사향노루 지나간 봄 산엔 풀 스스로 향기롭다 麝過春山草自香

 

□ 모두 특이한 상서[異祥]라 하였는데, 선생이 작고한 뒤에 가서야 식자(識者)들은 비로소 그것이 상서롭지 못한 것임을 알았다. '용이 돌아가고 사향노루가 지나는 것'은 모두 엄홀(奄忽)의 조짐이고, '구름이 젖고 풀이 향기로운 것'은 유택(遺澤)·고명(高名)만이 남아 있음을 가리킨 것이다. 대현(大賢)의 생몰(生沒)이 어찌 우연한 것이랴. (「장빈자호찬(長貧子胡撰)」에서 나왔다.)

 

□ 어떤 사람에게 답한 편지에, "무고(巫蠱)90)을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는데, 나의 의견은 그와 다르다. 율로(栗老)91)의 죽음은 시운과 안위(安危)가 관계된 것이니, 본래 소소한 좌도(左道)가 죽게 할 수 있는 바 아니다. 지금 만일 무고를 다스린다면 이는 바로 이 형의 죽음이 무고에 연유되고, 세간의 좌도가 참으로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율로는 시운에 따라 돌아가셨는데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 군자의 죽음은 결코 소소한 저주가 좌우할 수 있는 바 아니다."하였다. (「우계문집」에서 나왔다.)

 

□ 임진년(1592)에 이 일(李鎰)과 신 입(申砬)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로 이어 남하하는데, 병조 판서 홍 여순(洪汝諄)은 속수무책이었고, 면포(布)같은 물건을 또한 전례를 끌어 지급해서 그들의 행군을 위로하지도 못하였다. 그러자 장사(將士)들은 분노하여 '계미년 이 이'를 길에서 크게 부르짖는 자가 서로 연달았으니, 아마 선생을 사모한 것이었으리라. (남곽(南郭) 박 동열(朴東說)의 「수록(手錄)」에서 나왔다.)

 

□ 아계(鵝溪)는 남하고 말할 대 마다 언필칭 '율곡은 성인이고 송강은 병통이 많은 군자라'고 하였고, 서애는 매양 율곡을 칭찬하기를, "숙헌은 능히 수십 년 장래의 일을 내다보았는데, 우리 같은 무리는 몸소 직접 난을 당하여 어떻게 대처할 줄을 몰라서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우리는 바로 숙헌의 죄인이다."라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우산문집」에서 나왔다.)

 

□ 공(서애)이 말하기를 "큰 난을 겪은 뒤에 무슨 일을 한 번 해보고 싶으나 사람들 심정이 모두 옛 관습에 젖어서 시세를 깨닫지 못한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지금에 와서야 이 율곡은 마음이 공평하고 재주가 높음을 알겠소. 율곡이 살아 계신다면 아마 공과 더불어 서로 나라를 구제했을 것이오." 하매, 공은 얼른 칭찬하기를, "숙헌은 일을 처리하는 데 매우 과감하였다. 동료들이 그 당시에는 경솔하게 보아, 그 군사를 양성하고 공안(貢案)92)을 고치자는 말들이 모두 시대의 병폐를 환히 보고 한 것임을 알지 못했다. 숙헌은 재주가 놀라운데다 평탄하고 화평한 사람이었다." 하였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기록한 「서애유사(西崖遺事)」에서 나왔다.)

 

□ 만전(晩全) 홍 가신(洪可臣)이 해주를 맡았을 때 곧 석담(石潭)을 방문하여 조용히 경림(景臨)93)에게 말하기를, "율곡은 나를 자세하게 알고 깊이 인정하였다. 그런 때문에 나의 당초 천양(薦揚)은 모두 율곡으로 인한 것이었다. 모르는 자는 동서의 의논을 가지고 서로 계교를 하는데, 설사 의논에 불합한 곳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이것으로 흠을 잡을 것이겠는가. 하물며 율곡은 본래 치우친 바가 없고 매양 화합시킬 것으로 힘을 썼음이랴. 나는 깊이 그것을 알고 서로 믿기를 종시 한결같이 하였다. 율곡의 경륜으로 주상의 의중(倚重)이 되고 세무(世務)를 담당하여 매번 경장책(更張策)을 진언하였으니, 그 말이 행해지게 하였더라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이현(柳而見) 같은 자가 나란히 한 시대에 태어나서 매번 그 책략을 저지하였으니, 율곡의 경장책이 행해지지 못한 것은 모두 이현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하였다.

경림이 묻기를, "유 정승은 재주는 진실로 아름다우나 기백이 부족한 때문에 사업에 단점을 보인 것이지, 또한 어찌 기량이 좁아서 그런 것입니까." 하니, 만전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현은 재주와 기백은 다 훌륭하나 단지 처심(處心)이 부정할 뿐이다. 임오년간에 내가 장령(掌令)으로서 사정전(思政殿)에 입시하였더니, 그 때 마침 율곡의 봉사(奉事)가 올려졌다. 상이 그 소( )를 좌우에 두루 보이면서 묻기를 '경장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우찬성이 전부터 매번 청하는데, 나는 중난하게 여긴다' 하였다. 내가 곧 자리로 나가서 아뢰기를 '이는 실로 당금의 급무입니다.' 하고, 따라서 전우(殿宇)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 전우는 바로 조종조(祖宗朝)에서 창건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세월이 오래되어 퇴패(頹敗)가 이미 심한데도 앉아서 보기만 하고 수리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조종조에서 창건한 전우이니, 개수할 수 없다고 한다면, 반드시 훼멸에 이를 것입니다. 그 형세는 모름지기 다시 재목을 모으고 공인들을 소집하여 썩은 것을 고치고 헐어진 곳을 보수하며 옛것은 새롭게 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중신(重新)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이의 경장책이 어찌 이 경우와 다르겠습니까' 하니, 상이 옳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튿날 저보(邸報)94)를 보니, '부제학 유 성룡이, 우찬성 이 모가 소진(疏陳)한 제설(諸說)은 가벼이 변경할 수 없다는 일로 들어가 아뢰었다.' 이현은 외부인을 꺼리고 있었다. 내가 중문을 밀치고 들어갔더니, 이현은 나를 맞이하며 말하기를 '흥도(興道: 홍 가신의 자.)도 숙헌에게 부회(傅會)하는가 하였다. 내가 묻기를 '영공(令公)95)은 일찍이 율곡과 더불어 국사를 의논하지 않았소'하니, 이현이 말하기를 '일찍이 의논하였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그렇다면 그 경장책이 어떠하오' 하니, 이현이 말하기를 '좋은 것이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좋다면 영공은 왜 저지하오' 하니, 이현이 말하기를 '경장책은 비록 좋으나 숙헌의 재주가 그것을 처리할 수 없을 듯 싶으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도 율곡과 더불어 말했소' 하니, 이현이 말하기를 '일찍이 말하지 않았소' 하였다.

내가 탄식하기를 '영공의 생각이 틀렸소. 남과 국사를 의논함에 있어 면전에서는 응낙해 놓고 돌아서서는 저지하는 것이 옳은 일이오'하니, 이현은 안색이 변하며 답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부정한 곳이다. 대개 율곡과 이현이 나란히 한 시대에 태어나서 서로 합하지 못함이 이와 같았으니 이것 또한 기수(氣數)였던 것이다.

난을 겪은 후 이현이 스스로 당해 본 연후에야 비로소 율곡의 선견지명에 복종하였으나 또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였다. (「연보초고」에서 나왔다. 아래도 같다.)

 

□ 선군자께서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이현이 재기(才氣)는 참으로 아름다운데 다만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는 병통이 있어, 나와 함께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무리가 죽고 나면 반드시 그 재주를 실시할 것이다." 하였다.

임진난 이후, 서애가 국사를 담당하여 매양 조당(朝堂)에서 선군자의 선견·재조를 크게 칭찬하였다. 어떤 이가 서애는 율곡을 추허(追許)한다고 하자, 우계 선생은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현은 본시 그러하다. 그가 어찌 율곡의 어짊을 몰랐겠는가. 단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해서 죽은 뒤에 추허하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남명(南冥)96)의 시에,

 

사람이 바른 선비 좋아하는 것이 人之好正士

호피를 좋아하는 것과 같다. 好虎皮相似

생전에는 죽이려 하고는 生前欲殺之

사후에야 바야흐로 칭미한다 死後方稱美

 

는 것이 있으니, 이현이 이에 가깝다." 하였다.

 

□ 이에 앞서 조정 의논이 두 갈래로 갈려져서 동인은 심 의겸(沈義謙)더러 외척이라 하고, 서인은 김 효원(金孝元)더러 앙갚음을 한다고 하였다. 그때 김 응남(金應南)이 시망(時望)을 업고 외척을 공격하는 것으로 사론(士論)을 감고 있었다.

공(公: 이덕형(李德馨))은 후진으로서 김 응남의 논의가 이와 같음을 보고 마음속으로 꽤 믿었었는데. 그 후 김 응남의 행사하는 것을 보니 조금도 취할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율곡의 문집을 읽어보고 그 행기(行己) · 입심(立心)이 광명정대하여 탁연히 백대의 유종(儒宗)이 됨을 알게 된 연후에는 전일의 소견을 별안간 변경하였다. 언젠가 나에게 말하기를, "율곡의 학력의 높은 곳은 비록 퇴계라 할지라도 역시 이르지 못할 데가 있을 것이오." 하였다.

내가 이내 율곡의 행장을 지어 달라고 칭하였더니, 공은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대현의 행장을 짓겠소." 하였다. 그러나 굳이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는 더욱이 율곡의 동서를 타파해야 된다는 설을 옳게 여기어, 차자를 올려서 자신이 전일 한 쪽에 그릇 떨어졌던 잘못을 자책하였고, 또 무편무당(無偏無黨)97)을 가지고 탑전에서 진계(陳戒)하며 끝내 당론을 하지 않았으니, 그 율곡에 대한 경신(敬信)의 깊음을 볼 수 있다. (이 귀(李貴)가 지은 「한음유사(漢陰遺事)」에서 나왔다.)

 

□ 선생의 동 · 서를 탕척하자는 소(疏) 및 여러 왕복 서간들을 보면, 아주 공평하여 편당이 없었음이 참으로 마치 정 명도(程明道)가 희령(熙寧)98)에 대처했던 것과 같았다. 계미년에 이조 판서로서 인사권을 쥐게 되매 진퇴·거조(進退擧錯)가 점차로 두서를 이루어가서 평소 동 · 서를 타파하려던 계책이 거의 이루어지게 되었었는데, 생민(生民)이 복이 없었는지 하늘이 율곡을 앗아가기를 그처럼 빨리 하였다. 아! 선생의 지공(至公)한 혈성(血誠)으로서도 당시에 오히려 군소(群小)배들이 모질(嫉)의 대상이 됨을 면하지 못하였고, 사후에 미쳐서는 기흘(  )99)이 더욱 심하였다.

저 모질자들은 족히 말할 것도 못되거니와, 김 우옹(金宇) 같은 무리는 실로 선생이 교유를 갖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니, 선생의 대중 지정(大中至正)한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닐 터인데 이에 부박(浮薄)한 무리와 합하여 일체가 되어서 조금도 가차없이 배척하여 인심을 오도하고 국맥(國脈)을 손상시키매 사론(士論)이 횡궤(橫潰)하여 수습할 수 없게 되었으니 통탄을 금할 수 있겠는가. (「우산잡록(牛山雜錄)」에서 나왔다.)

 

□ 율곡은 자품(資稟)이 매우 높고 충양(充養)이 더욱 두터웠으며, 청명(淸明) · 화수(禾穗)하고 탄이(坦夷) · 영과(英果)하였다. 사람을 상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한결같이 성신(誠信)으로 하고, 은혐(恩嫌) · 애오(愛惡)를 일호도 개의치 않으니, 어리석은 사람, 지혜스런 사람을 막론하고 진심으로 율곡을 사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율곡은 세상을 구제하는 일을 급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미 물러났다가 다시 진출하여 사류(士類)를 보합(保合)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고 사심없이 할만을 다하여 좌우로 기휘(忌諱)에 저촉되니, 드디어 당인(黨人)의 원수가 되어 거의 큰 화를 면하지 못할 뻔 하였다. 그가 사람을 천거하는 데는 반드시 학문과 명검(名檢)100)을 위주로 하였다. 그런 때문에 거짓을 꾸며 슬쩍 합한 자들은 뒤에 많이 배반하였다.

그래서 유속(流俗)의 논의에서는 율곡을 가리켜 소활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율곡이 작고한 뒤에 편당이 크게 승하여 한쪽으로 치달아 갔으므로, 조정이 이미 바로잡혀졌다고 하였으나 속은 저절로 괴리되어 사분오열하여 결국 국가의 무궁한 화가 되었다.

임진년의 난에 이르러 봉강(封疆)이 스스로 무너지고 나라가 드디어 기울어지니, 율곡이 평일에 미리 염려하고 먼저 말한 바가 부험(符驗)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편의를 건청(建淸)한 책략이 뒤늦게 채용되고 국론(國論)과 민언(言民)이 모두 그를 칭송하니, 그 도덕 충의의 실상에는 굽히지 못할 것이 있는 것이다. (「택당잡고」에서 나왔다.)

 

□ 나의 종친인 율곡공은 자품과 학식이 정암(靜菴)과 퇴계(退溪)에 내리지 않았고, 게다가 경제재략(經濟才略)이 있었다. 이미 선조에게 지우(知遇)를 받아 선조는 그의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국가의 안위를 스스로 책임하고 아는 일이면 말하지 않음이 없고 말할 경우엔 숨김없이 다 역설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것은 대개 폐법(弊法)을 변통하여 백성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튼튼하게 만들어서 큰 난의 조짐을 막으려고 했던 것인데, 먼저 조정을 화합하고 인재를 모은 연후에 시행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문득 당인에게 모함된 바가 되었다. 선조의 진정시킴을 힘입어서 겨우 정암(靜菴)이 당한 화를 면하고 자택에서 편안히 죽을 수 있었으니 도의 행해지기 어려움이 이와 같다. (「택당 문집」에서 나왔다.)

 

□ 선생이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는 국경이 조용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므로 걱정할 만한 일이 없는 듯 하였는데, 선생은 임금에게 충언을 드림에 노력과 성의를 기울이면서 조처하고 배치하는 일 등을 모두 황급하게 서두르기를 마치 난망(亂亡)의 호가 조석간에 일어날 것처럼 하였으니, 당시 논자(論者)들 중 그 누가 오원(迂遠)하여 시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오늘날에서 본다면 선생의 말이 마치 부계(符契)처럼 착착 맞으니, 그 때 가사 그것이 세상에 시행되어 고택(膏澤)이 위에서 막히지 않고 풍화가 아래에서 크게 변하였더라면 민생의 도탄이 필시 이처럼 가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촌(象邨) 신 흠(申欽)의 문집에서 나왔다.)

 

□ 이 이가 곤란을 당한 이유는, 의논하는 자가, 공안(貢案)을 변경하는 것은 불편하다, 여러 고을에 정원 외의 군사를 두는 것은 부당하다, 곡식을 바침에 따라 관작을 제수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서얼(庶孼)에게 벼슬길을 터 주는 것은 불가하다. 성과 보루(堡壘)를 다시 쌓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병란을 겪은 뒤에 조정에서 적을 막고 백성을 편케 할 대책을 부지런히 강구하는 것이 이 다섯 가지에 벗어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개 이 이의 선견지명은 이미 수십 년 전에 환히 알고 있었으므로, 비록 몇 가지의 시행이 평시에 있어서는 구차한 일인 줄 알았지만 환난을 예상하여 미리 방지하자면 경장(更張)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뭇 사람들의 기탄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말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속된 선비들은 좁은 소견에 이끌려서 요란스럽다느니, 타당치 못하다느니 하면서 어지럽게 서로 시새워 미워하였으니, 그 몸을 용납하지 못하고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질 수 없었음이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논의하는 자는 이 이를 배척하는 데는 힘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다섯 가지를 받들어 시행하는 데 있어서는 행여 미치지 못할 세라 하고들 있으니, 크게 가소로운 일이다. (「양천 부부고」에서 나왔다.)

 

□ 참봉 권 시경(權是經)은 월천(月川) 조 목(趙穆)의 표질(表姪)이다. 그가 우연히 율곡선생의 「격몽요결」101)을 얻어 월천에게 드리니, 월천이 크게 칭찬하기를, "율곡이 일찍이 퇴계의 문하에 종유하였으므로 소견이 고명하여 이 책을 지었다. 이 책은 천하만세에 행해질 만한 것이지, 어찌 동방에만 행해지고 말 책인가." 하였다. 권 시경이 이로부터 「격몽요결」을 경신(敬信)하되, 노재(魯齋)102)가 「소학」을 신봉하던 것과 같을 뿐이 아니었다. (월천 조목의 「유사(遺事」에서 나왔다.)

 

□ 숙헌(叔獻)이 「성학집요」 초본을 내다가 나에게 보였는데, 그것은 대개 임금에게 바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책은 처음에 「중용」 수장(首章)과 「대학」 경문(經文)을 끌어다 맨 머리에 적고 표(標)하기를 통설이라 하였다. 그 다음은 수기(修己)로 강(綱)을 하였으며, 그 목(目)은 총론수기(總論修己)·입지(立志)·수렴(收斂)·궁리(窮理) 등이었다. 대요(大要)는 경전과 성현의 가장 긴요한 말들을 위에 벌여놓고 제설(諸說)을 아래에 붙였으며 끝에는 또 자기 뜻으로 단안을 내렸다. 조리가 정연하여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대의가 이미 약여(躍如)하였는데, 단, 시작만 겨우 해 놓고 아직 마무리짓지 못한 상태였다.

숙헌이 나에게 이르기를, "만일 책이 이루어진다면 3권으로 정리될 것인데 궁리 이하는 성의 · 정심 · 수신 · 제가 · 치국 · 평천하를 가지고 차례에 따라 종류 별로 나누어서 설명하려고 한다." 하였다. 그 중에 입지를 논한 한 조문은 어의(語義)가 극히 정밀하여 학자의 병통을 적중한 것이다. 가히 임금의 약석(藥石)과 학자의 궤범(軌範)이 될 만하니, 마땅히 완미(玩味)하여 반복해야 할 것이다. (허 봉(許)의 「조천록(朝天錄)」에서 나왔다.)

 

□ 율곡의 「사서결석(四書訣釋)」과 「소주비말(小註批抹)」103)은 극히 정상(精詳)하여 후학들을 감발히킬 수 있는 것이었다. 경전에는 미처 공을 마치지 못하고 또, 당세에 널리 유포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기암잡록(畸雜錄)」에서 나왔다.)

 

□ 「소학」은 주설자들의 견해가 대부분 달라서 올바른 해석으로 귀일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율곡은 제가(諸家)의 주설을 취하여 번다한 것은 깎고 요긴한 것은 모으며, 장점은 집적하고 단점은 버리어 일단 경지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명백하고 평실하게 하였다. 동시에 자세하게 하기도하고 혹은 간략하게 하기도 하여 또 서로서로 발명이 되도록 하였으니, 군언(言)의 양단(兩端)을 잡아 절충을 잘 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우계문집(牛溪文集)」에서 나왔다.)

 

□ 박 순경(朴舜卿)에게 준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기(日記)」104)는 가장 격언이 많으므로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다. 백세 후에 이 분이 청천백일과 같았음을 아는데 있어 아주 관계가 깊은 것이다. 그러나 판각해내면 반드시 유전하게 되어 큰 화를 초래할까 두려우니, 다만 나누어 수십 본(本)을 써서 여러 벗의 집에 간직해 두었다가 수십 년이 지난 뒤에 정사(精舍)에서 간행하였으면 한다."

 

□ 또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이 발(李潑)에게 준 편지의 제목에 그의 자를 쓰지 않고 '답이발(答李潑)'이라 썼으니, 붕우의 예(例)로 대하지 않은 것이다. 그 편지는 동서분당을 논한 것이 매우 자상하고 이 발의 심술을 지척한 말이 몹시 준엄하다. 지금 이 편지를 문집 속에 머물러 두어서 천재 이후의 사람들로 하여금 선생이 이미 이 사람을 간파하였음을 알게 하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 「현승(玄繩)」 한 편에서 여러 노선생(老先生)의 왕복언론을 보았는데, 그 강문(講問)의 근면함과 우의(友誼)의 돈독함을 모두 상상해 볼 수 있다. 지금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율곡의 말은 진솔 탄이(眞率坦易)하고 우계(牛溪)의 말은 온공 간도(溫恭懇到)하며 구봉(龜峯)의 경우는 의상(意象)이 준결(峻潔)하고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매우 신중하다. 그러나 왕왕 타당하지 못한 곳이 있다. (「계곡문집(谿谷文集)」에서 나왔다.)

 

□ 「율곡집」 7권을 먼저 보낸다. 율곡의 몸소 실천한 것이라든가, 학문상 조예의 깊이는 식견이 얄팍한 후생으로서의 헤아릴 바가 아니나 한번 그의 입론을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상쾌하게 하니, 그 간기(間氣)105)의 발현은 더욱 경의를 표하게 한다. (「한음 수첩(手帖)」에서 나왔다.)

 

□ 동고(東皐)는 안하무문(眼下無文)106)이었으나 매번 율곡을 칭찬하기를, "표현만 하면 문장을 이루어 흉중에서 유출되는 문장은 남들이 미칠 수 없다." 하였다. (「기암잡록(畸雜錄)」에서 나왔다.)

 

□ 간이(簡易) 최 입(崔)이 언젠가 말하기를, "율곡은 어릴 대부터 글을 지었는데 별로 힘들이지 않고서도 문장이 천연적으로 나와서 평정하고 명쾌하였으니, 이른바 포백숙속지문(布帛菽粟之文)107)이다." 하였다. (「연보초고」에서 나왔다.)

 

□ 두 사신(중국의 사신)이 순안(順安)에 이르러서 '알기자묘부(謁箕子廟賦)'를 내보이자 율곡은 여러 종사관으로 하여금 화답하게 하였다. 이 때 날이 이미 어두워 세 종사관은 최 성천 입지(崔成川立之)108)와 막 술을 많이 마시는 중이었으므로 서로 마주 보며 혀를 빼물고 능히 붓을 잡지 못하였고, 최 입지가 단지 첫머리 글귀의 두 운(韻)만을 차운했을 뿐이었다. 율곡은 새벽에 일어나 단번에 내려써서 곧 한 호(韓濩)109)로 하여금 먼저 백상루(白祥樓)에 가서 깨끗하게 써 가지고 두 사신이 가마에서 내리는 즉시로 드리도록 하였다. 두 사신은 공수(拱手)하며 말하기를, "우리가 오랜 동안 대인(大人)의 도덕은 흠모하였지만 문장이 이처럼 훌륭할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하였다. (「남곽수록(南郭手錄)」에서 나왔다.)

 

□ "못난 것이 변변찮게 봉명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정해진 기일에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왕(賢王)께서는 융숭한 예로 대접해 주시고, 또 집사께서는 정성을 기울여 다정하게 대하여 주셨습니다. 한 달 동안 정의는 흡족했고 천리를 멀다 않고 수행하셨습니다. 나를 뜨뜻한 정으로 대해 주고 나에게 좋은 글도 주셨습니다. 문체는 웅장 화려하였고 위로는 치밀하였습니다. 통하지 않았던 것은 언어요, 서로 통한 것은 마음이었습니다. 한달 동안 흉금을 털어놓고 담소하였으니, 그 의기(意氣)는 천고에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왕사(王事)를 소홀하게 할 수 없어 아침 일찍 떠날 채비를 서두릅니다. 후대한 정의는 한없이 그리우나 오래도록 머물러 있기가 어렵습니다. 막상 떠날 길에 다다르니 얼마나 서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이별에 있어서의 상심된 정황은 자고로 비탄해 마지않는 것인데, 하물며 낯선 고장에서 서로 정담을 나누고 뒤에 만날 기약조차 없는 처지임에리까. 옛말에 '눈물은 생이별을 위해 더 불어난다[淚爲生別滋]' 하였는데 틀림없는 말입니다. 오직 수시로 요화(瑤華)110)를 외워 경수(璥樹)111)를 본 것처럼 하겠습니다. 자나 깨나 항상 그 정의 마음 속에 간직할 뿐입니다. 떠날 마차는 길에 서 있고 북풍은 차갑게 몰아칩니다. 머리 돌이켜 고인을 바라보니 홀연 각각 지역을 달리합니다.

마침 증언(贈言)112)을 받았기에 요초(草)113)로써 사례합니다. 막상 쓰려고 종이를 대하니 말문이 막혀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지생(知生) 황 홍헌(黃洪憲)은 재배하고 율곡 이 선생에게 올립니다." (「황화집(黃華集)」에서 나왔다.)

 

□ "귀국의 임금께서는 천조(天朝)에 충경(忠敬)하고 사자(使者)에게까지 미치니 그 사랑의 정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케 합니다. 이에 족하(足下)114)께서 임금을 보좌하여 사절의 내왕을 영송(迎送)함에 있어 일에 경건한 그 근면성은 물론이지만, 곧 수화(酬和: 시를 지어 회답함.)의 일절은 뜻이 진실하고 문장이 훌륭하니, 완상(玩賞)하매 수주(隋珠)·화벽(和壁)115) 정도의 귀중한 가치를 지녔을 뿐이 아닙니다.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이별하면 뒤에 회합할 기약이 없으니, 어찌 서운한 마음 가눌 수 있겠습니까. 생각컨데 말로는 뜻을 다 표현할 수 없기에 애오라지 종이에 의탁하여 진술합니다.

바라건대, 나를 위하여 귀국의 임금께 사례말씀 전하고 겸하여 여러 대부들에게도 이 의사를 전달해 주시길 간절히 당부 드립니다. 부쳐 드린 졸작에는 맹랑한 말이 많습니다. 그 각관(各官)에 유증(留贈)116)한 시는 나의 것만 있고 나의 동년(同年)117) 것은 없는 경우가 간행할 때에 모두 삭제해 버림으로써 다과가 서로 비교되지 않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머지는 갖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지생 왕 경민(王敬民)은 재배하고 국상(國相) 이 율곡 선생에게 올립니다."

 

□ 「율곡시집」발문(跋文)에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내가 가만히 임오년간의 일을 기억해 보건대, 공이 황 홍헌(黃洪憲)·왕 경민 두 조사(詔使)를 멀리 나가 영접할 때 시배들이 '공이 평소 성시(聲詩)118)를 즐기지 않았으니, 혹 갱수(酬)119)에 부족한 점이 없을까' 라고 하였다. 나는 그때 마침 관서(關西: 평안도)의 성천부사(成川府使)로 있으면서 중국에서 잇달아 오는 벼슬아치들을 만난 경험이 있었으므로 선뜻 장담하기를 '공은 필시 중국 사신에게 대단히 존중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 이윽고 과연 빈주간에 서로 공경하고 화기애애함이 근고에 있었던 용재(容齋)120)·호음(湖陰)121) 때 일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그것 보다도 월등하게 나았으니, 여기서 또한 공이 시를 한 것도 아니지만 시를 안한 것도 또한 아니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간이(簡易) 최 입(崔)의 문집에서 나왔다.)

 

□ 율곡 선생을 조곡하였다. 선생(우계 선생을 말함.)이 애도하기를, "율곡은 도체(道體)에 있어서 큰 근원을 환하게 꿰뚫어 보았다. 이른바 '천지의 조화에는 두 근본이 없고, 인심의 발현에는 두 근원이 없으며, 이(理)와 기(氣)는 서로 발할 수 없다'는 등의 말은 참으로 나의 스승이었다. 그의 애군우국(愛君憂國)의 충정과 경세구민(經世救民)의 의지는 옛날 사람에게서 찾아보아도 그와 필적할 만한 자가 적다. 참으로 그는 산하간기(山河間氣)요, 삼대인물(三代人物)122)이었는데 이 세상에서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뜻을 간직한 채 작고하였으니, 참으로 천도는 믿기 어렵도다." 하였다. (「우계연보(牛溪年譜)」에서 나왔다.)

 

□ 우계선생이 언젠가 경림(景臨)에게 말하기를, "율곡은 참으로 5백 년 동안에 흔치 않게 걸출한 인물이었다. 내가 소시에 강론하면서는 친구라 생각하여 서로 버티고 하였는데, 노경에 와서 생각해 보니, 참으로 나의 스승이었으며, 나를 깨우쳐 줌이 매우 많았다. 기일(忌日)에 소복을 입는 일을 예전에는 하지 않았는데 지금 시작했다." 하였다. (「연보초고」에서 나왔다.)

 

□ 오 효원(吳孝元)에게 답한 편지에, "선선생(先先生)123)의 천재(天才)의 고매(高邁)함고 조도(造道)의 초예(超詣), 그리고 탁월한 식견, 규모의 정대함은 근세학자로서 그의 주변을 엿볼 수 있는 바 아니다." 하였다. (「우계문집(牛溪文集)」에서 나왔다.)

 

□ 율곡은 당대의 거유(鉅儒)가 된다. 이는 일시 동배(同背)의 견해가 아니라. 실로 후세의 공론인 것이다. (구봉(龜峯)의 예답문(禮答問)에서 나왔다.)

 

□ 선생은 고매하고 탁월한 자질로 임금을 요순같은 임금으로 만들고 백성을 요순시대의 백성처럼 만들려는 뜻을 품고서, 관로에 나아가면 소장(疏章)등을 연달아 올려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시속을 바로잡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고, 관로에서 물러났을 적에는 자세하게 생각하고 깊이 연구하여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욕을 제거하는 것으로써 큰 근본을 삼았다. 그의 심학소득의 심천과 학문조예의 고하는 후학의 얕은 소견으로 헤아릴 수 있는 바 아니지만, 그 광명위엽(光明燁)하고 통투쇄락(通透灑落)하여 만물의 겉에 펼쳐진 것으로 말하면, 동유(童儒)·하천(下賤)들도 충분히 볼 수가 있는 것이니, 선생은 인호(人豪)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촌문집(象邨文集)」에서 나왔다.)

 

□ 수암(守菴) 박 지화(朴枝華)·정산(鼎山) 박 형(朴泂)이 언젠가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나라 수백 년의 종사(宗社)를 위하여 율곡을 내고, 우리 동방 만고의 강상(綱常)을 위하여 중봉(重峯)을 냈으니, 그 의도는 우연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우산문집(牛山文集)」에서 나왔다.)

 

□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영명(英明)하고 청통(淸桶)하고 화락하며, 학문은 체용을 갖추어 제설(諸說)을 절충하고 군현(賢)을 집대성하였으니, 실로 동방에 있어서 천재(千載)의 진유(眞儒)요, 경륜(經綸)의 대재(大材)인 것이다. (「우산잡록(牛山雜錄)」에서 나왔다.)

 

□ 나는 율곡에게는 심복하여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고 늘 생각했지만, 우계(牛溪)에 대해서는 약간 차이있게 보는 점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런 때문에 우계의 문인들은 꽤 불평이 있었다. 그 후 우계에게 왕래하며 익숙해짐에 따라 그의 기모(氣貌)를 보고 그의 의론을 들고 나서야 율곡이 그를 도의교(道義交)로 여겼던 것에는 까닭이 있었음을 알았다. (「사계어록(沙溪語錄)」에서 나왔다.)

 

□ 석주(石洲) 권 필(權)이 석담(石潭)에 찾아와서 조용히 나에게 말하기를, "선인께서는 늘 율곡선생은 명도기상(明道氣象)124)이 있다고 하셨다. 우리들은 소시부터 가정의 의론이 이와 같음을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 동방에서 제유(諸儒)를 집대성한 분은 바로 선생 한 사람 뿐이라고 항시 여긴다."하였다. (「연보초고」에서 나왔다.)

 

퇴계는 학문을 잘 말하고, 율곡은 이치를 잘 말한다. (「농암문집(農巖文集)」에서 나왔다. 아래도 같다.)

 

□ 정암(靜菴)과 율곡은 타고난 자질이 모두 탁월하고 명석한 편에 속한다. 그러나 정암은 간중 온률(簡重溫栗)하고, 율곡은 청통 쇄락(淸通灑落)하다. 그리고 정암은 정금 미옥(精金美玉)과 같고 율곡은 광풍 제월(光風霽月)과 같다. 두 선생이 조정에서 행한 일을 살펴보면, 정암의 정백 전일(精白專一)한 정신은 족히 사람을 용동(聳動)시키고, 율곡의 공성 탄탕(公誠坦蕩)한 마음은 족히 사람을 심복시켰다. 그러나 율곡의 재주가 비교적 높다.

 

□ 율곡은 정암의 수속 검제(收束檢制)에 못 미치고, 정암은 율곡의 전척 개활(展拓開豁)에 미치지 못한다.

 

□ 조 문정(趙文正: 문정은 정암의 시호)의 창명 표준(倡明表準)과 이 문순(李文純: 문순은 퇴계의 시호)의 침잠 천역(沈潛闡繹)과 이 문성(李文成: 문성은 율곡의 시호)의 발휘 운용(發揮運用)은 마땅히 조선조 유현(儒賢)의 최상이 될 것이다.

 

< 주 >

1) 선고(先考)나 선친(先親)과 같이 돌아간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인데, 여기서는 이 경림(李景臨)의 아버지인 율곡을 말한다.

2) 덕행(德行)과 한문을 힘쓰는 선비를 가리킨다.

3) 문공은 중국 당(唐)의 덕종(德宗)때 문학에 뛰어난 한 유(韓兪)의 시호. 자는 퇴지(退之). 그는 정치적으로 불우한 사람이었으나 문장에 능하여 당송팔대가(唐宋八代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4) 이 말은 한 유가 최 군(崔)에게 준 편지에서 그의 인품을 찬양한 대문이다.

5) 근골(筋骨)이 결합(結合)된 곳이니, 즉 논리 등의 요긴한 부분을 가리킨다.

6) 조선조 선조 때의 학자인 송 익필(宋翼弼)의 호. 그는 자가 운장(雲長)이며, 당시 율곡 이이 · 우계(牛溪)·성 혼(成渾)과 교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여 뛰어난 성리학자로 꼽히게 되었다.

7) 율곡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한 제자를 가리킨다.

8) 여기서는 율곡이 지은 송강의 아버지인 유침(惟沈)의 묘지문(墓誌文)을 가리킨다.

9) 사암은 조선조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 순(朴淳)의 호. 그는 퇴계 · 율곡을 도움으로써서인으로 지목까지 받았으며, 동서분당이 되자 영평(永平)의 백운산(白雲山)에 숨어 살았다.

10) 성 혼(成渾)의 호, 그는 청송(聽松) 성 수침(成守琛)의 아들이자 휴암(休菴) 백 인걸(白仁傑)의 문인으로 젊어서부터 덕망과 학문이 뛰어났고, 율곡과는 사단칠정 이기설(四端七情理氣說)을 토론하여 많은 왕복(往復) 문변(問辨)이 있었다.

11) 선생 : 여기서는 우계(牛溪) 성 혼(成渾)을 가리킨다.

12) 정 철(鄭澈, 1536∼1593)의 호.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그는 예조 판서·대사간 등을 역임하였고, 서인(西人)의 거장으로서 당쟁(黨爭)에 투신하여 많은 풍상을 겪었으며, 특히 시에 능하여 송강가사(松江歌辭)와 많은 시조를 남겨 국문학에 공헌한 바 매우 크다.

13) 이 말은 「논어(論語)」 양화(陽貨)편에 보인다.

14) 여기서는 우계(牛溪) 성 혼(成渾)을 가리킨다.

15) 송대(宋代)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사마 광(司馬光)을 가리킴. 자는 군실(君實), 호는 우부(迂夫) 또는 우수(迂)이나 흔히 사마 온공(司馬溫公)으로 칭함. 그는 신종(神宗) 때 왕 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나와 「자치통감(資治通鑑)」 의 편찬에 전념하였다.

16) 유 안세(劉安世)를 가리킴. 원성(元城)의 사람으로 자는 기지(器之), 시호는 충정(忠定). 그는 간의 대부(諫議大夫)로 있을 때 논사(論事)에 워낙 강직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들 경외(敬畏)하여 '전상호(殿上虎)'라고 지칭하였다. 《宋史 三白四十五 宋元學案 二十》

17) 임부(姙婦)가 일체의 시·청·언·동(視聽言動) 등을 예법에 맞게 하면 태아(胎兒)가 자연 그 감화를 받게 되니, 이를 태교라 한다.

18)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 균(許均)의 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를 가리킨다.

19) 조충전각(彫蟲篆刻)의 약칭으로 문장을 구성하기 위하여 글귀를 수식하는 일을 말한다.

20) 불교의 용어로 지계(持戒)와 선정(禪定)을 가리크는데, 지게는 계행(戒行)을 지키는 일이고, 선정은 참선(參善)하여 삼매경(三昧境)에 이르는 일이다.

21) 적선(積善)과 같음. 「맹자(孟子)」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보인다.

22) 주자(朱子)의 「중용(中庸)」 서문에 "마음의 허령지각(虛靈知覺)은 동일할 뿐인데 인심」도심의 다름이 잇다고 하는 점은 그것이 혹은 형기(形氣)의 사욕에서 나기도 하고 혹은 성명(性命)의 올바름에 근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心之虛靈知覺一而巳矣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고 보인다.

23) 「논어」안연(顔淵)편에 보이는데, 그주(註)에 의하면, "기(己)는 자신의 사욕이고, 예(禮)는 천리의 절문이다....... 사욕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오면 일이 모두 천리여서 본심의 덕이 다시 나에게 온전할 것이다....... [己謂身之私欲 禮者天理之節文......勝私欲而復於禮 則事皆天理 而本心之德 復全於我矣.....]"고 풀이하였다.

24) 「대학(大學)」 8조목 중의 한 조목으로서 여러 세기를 두고 논란이 되어 온 것이다. 해석을 달리한 제가(諸家)는 대략·다음과 같다. 한(漢)의 정 현(鄭玄)은 "격(格)은 온다[來]'의 뜻이고, '물(物)은 일[事]'의 뜻이다. 선(善)에 대해 앎이 깊으면 선물(善物)이 오고, 악(惡)에 대해 앎이 깊으면 악물(惡物)이 오니, 일은 사람이 좋아하는 바를 연유하여 오는 것을 말한다" 하였고, 당(唐)의 공 영달(孔潁達)은 정현의 해석을 부연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송(宋)의 주희(朱熹)는 격(格)은 지(至)로, 물(物)은 사(事)로 보고 격물(格物)은 "窮至事物之理 欲其極處無不到也"라 하고, 물격(物格)은 "物理之極處 無不到也"라 하였으며, 명(明)의 왕 수인(王守仁)은 주설(朱說)에 반기를 들록 나서 격(格)은 정(正)으로, 물(物)은 뜻[意]의 용(用)으로 보아, 격물(格物)은 곧 뜻의 바르지 못한 것을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라 풀이하였다. 왕 수인의 이러한 해석이 나온 뒤로 주자학파와 양명학파가 대립되었으나 중국 학자 중에는 주자설을 따르는 편이 역시 많았고,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주자의 해석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속에서 나름대로의 풀이를 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퇴계(退溪) 이 황(李滉)은 처음에는, 只知守朱子理無情意無計度無造作之說 以爲我可以窮到物理之極處 理豈能自至於極處 故硬把物格之格無不到之到 皆作己格到看"《退溪文集 卷十八 答奇明彦 別紙》이라 하여, 이(理)는 사물(死物)로 보고 나 자신이 궁도(窮到)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다가 고봉(高峯) 기 대승(奇大升)의 질문을 받고는 "...向也但有見於本體之無爲 而不知妙用之能顯行 殆若認理爲死物 其去道不亦遠其矣乎 今賴高明提諭之勤 得去妄見 而得新意長新格深以爲幸"이라 하여 종전의 견해에 잘못을 느겼다. 그리고 격물(格物)을 '물(物)을 격(格)함이' 물격(物格)은 '물(物)에 격(格)함은'이라 토를 달고는 "格字有窮而至之義 格物重在窮字 故云物乙格乎麻是 物格重在至字 故云物涯格爲隱이라하며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退溪集 卷二十六 格物物格俗說辯疑答鄭子中》율곡(栗谷) 이 이(李珥)는 "程朱皆說格至也 據此論之 格物云者 人窮物之理 而使之至於盡處也 物格云者 物之理 已至於盡處 更無可窮之餘地也 此說通透灑落 十分明白 而後之紛紛之說甚多 至有物理來至吾心之說 殊不可曉 《栗谷集 語錄》라 하고, "格字有窮至兩意 格物之格 窮字意多 格物之格 只是至字之意" 《栗谷集 聖學輯要》라고 보아 퇴계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25) 만회는 권 득기(權得己, 1570(선조 3)∼1622(광해군 14))의 호. 권 극례(權克禮)의 아들로 광해군 때 예조 좌랑을 거쳐 고산찰방(高山察訪)으로 있다가 정치가 혼란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26) 휴암(休菴) 백 인걸(白仁傑, 1497(연산군 3)∼1579(선조 12))을 가리킴. 그는 기묘사화 때 스승과 동지들을 다 잃고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뒤에 선조조에서 이조 참판·대사간·대사헌 등을 거쳐 참찬(參贊)에 이르렀는데, 당쟁의 폐단을 논하고 국경의 군비 강화를 주장하는 등 국리민복(國利民福)에 심혈을 기울였다.

27) 여기서는 율곡의 아버지인 이 원수(李元秀)를 가리킴. 율곡의 현달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28) 여기서는 율곡을 가리킨다.

29) 동년방(同年榜) : 같은 때 관리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나열해 적은 방목(榜目)을 가리킨다.

30) 여기서는 이 번(李)을 가리킨다.

31) 삼상(三相)에 다음 가는 벼슬이란 뜻으로 좌 · 우찬성(左右贊成)을 가리킨다.

32) 벼슬이 높고, 나이가 많고, 덕이 높다는 뜻으로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보인다.

33)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관직. 조정에서 문명과 덕망이 있는 2품관을 선발하였고, 원접사는 의주(義州)까지 가서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임무를 맡았다.

34) 관리가 부정하게 뇌물을 받거나, 직권을 부려서 재물을 탐한 죄.

35) 여기서는 하느님이 주신 물건이란 말이다.

36) 도교(道敎)의 의식으로 오성(五星)·열수(列宿)에 초제(醮祭) 지낼 때 제문(祭文) 형식으로 짓는 청사(靑詞). 청사는 문체의 하나.

37) 여기서는 유교(儒敎)에 위배되는 사교(邪敎)를 가리킨다.

38) 관원을 선임할 때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에서 올리는 후보자 세 사람 중의 첫째를 가리킨다.

39) 관원을 선임할 때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세 사람을 갖추어 올리면 임금이 그 중 한 사람의 이름 위에 점을 찍어서 뽑는 일을 말한다.

40) 율곡행장(栗谷行狀)에 "先生 嘗因書堂月製 乃設爲問答之辭 論王伯治國安民之道 名之曰東湖問答"이라는 것으로 볼 때 월과(月課)와 같은 뜻인 듯하다.

41) 동호문답(東湖問答) : 율곡이 1569년(선조 2)독서당에 있을 대 경국치민(經國治民)에 대한 의견을 문답식으로 서술한 책. 군도(君道)·신도(臣道)·군신상득지난(君臣相得之難)·동방도학불행(東方道學不行)·아조고도불복(我朝古道不復)·당금지시세(當今之時勢)·무실위수기지요(務實爲修己之要)·변간위용현지술(辨姦爲用賢之術)·안민지술(安民之術)·교인지술(敎人之術)·정명위치도지본(正名爲治道之本)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42) 여기서는 동고(東皐) 이 준경(李浚慶)을 가리킨다.

43) 임금 앞에서 경서(經書) 등을 강론하는 자리. 경연(經筵).

44) 여기서는 임금의 허물을 거리낌 없이 직간(直諫)하는 강직함을 가리킨다.

45) 오시(午時)와 같은 말이다.

46) 궁녀와 환관(宦官)을 가리킨다.

47) 어진 사람을 구하려는 일념에서 제대로 정좌(正坐)하지 못하는 일이다.

48) 지극한 대우를 칭함. 「주역(周易)」진쾌(晋卦)의 괘사(卦辭)에 "......낮에 세 번씩이나 접견하도다[......晝日三接]" 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역」에서는 진괘가 나라를 안정시킨 벼슬아치에게 후한 상을 주고 낮에 세 번씩이나 접견할 정도로 우대하는 격의 상을 가졌음을 말하였다.

49) 떠나려는 사람을 못가게 붙잡는 일이다. 「시경(詩經)」소아(小雅) 백구(白駒)편에 "결백한 백구(白駒)가 우리 마당의 남새를 뜯어 먹었다 핑계하고 잡아매어......이른바 이인(伊人·賢人)이 이에 소요하게 하리라......결백한 백구가 저 공곡(空谷)에 있으니......[白駒 食我場苗 之維之......所謂伊人 於焉逍遙......白駒......在彼空谷......]"라 보인다. 「시경」에서는, 어진 사람이 떠나는 것을 만류할 수가 없어서 그가 타고 온 말이 우리 곡식을 뜯어 먹었다고 붙잡아 맴으로써 어진 사람이 떠나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진 사람은 기필코 떠나므로 만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진 사람이 백구를 타고 공곡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뜻을 읊은 것이다. 여기서는 「주역」과 「시경」에 있는 말을 빌어서 "이 이(李珥)를 당초에 후대하지도 않고, 떠나는 마당에서 붙잡지도 않았다는 뜻을 문학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50) 여기서는 율곡을 가리킨다.

51) 지방의 노비(奴婢)를 골라 뽑아서 서울의 관아에 올리는 일이다.

52) 모든 벼슬아치가 관부에 있을 때 드는 음식물을 각자의 집에서 제공하도록 하는 법.

53) 법강(法講)의 한 가지로 경연 특진관(經筵特進官) 이하가 낮에 행하는 것이다.

54) 여기서는 국가의 운영 계획을 세우는 곳을 가리킨다.

55) 숙헌은 율곡의 자(字).

56) 부정의 유무를 조사해 내는 일이다.

57) 오리(悟里) 이 원익(李元翼, 1547(명종 2)∼1634(인조 12))을 가리킴. 그는 1569년(선조 2)문과에 급제한 후 황해도사(黃海都事) · 정언(正言) 등을 거쳐 1952년 임진왜란 때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왕의 피란을 선도하였고, 1593년 평양 탈환작전에 공을 세우고 1595년 우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며, 159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공부(貢賦)를 단일화시켰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58) 문성은 율곡의 시호이다.

59) 조 중봉(趙重峯) : 중봉은 의병장(義兵將) 조 헌(趙憲, 1544(중종 39)∼1592(선조 25))의 호. 자는 여식(汝式)으로 이 이(李珥) · 성 혼(成渾)의 문인. 1567년 (명종 60) 문과에 급제 한 후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 · 통진현감(通津縣監) · 종묘서령(宗廟署令) · 보은현감(報恩縣監)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靈圭)등 승병(僧兵)과 합세하여 청주(淸州)를 수복하고, 이어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錦山)으로 향하였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官軍)의 방해로 대부분의 의병이 해산당하고 불과 7백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 참가하여 용전하다가 7백의 의병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는 또한 이 이의 문인 중 뛰어난 학자로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 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60) 견거는 옷자락을 잡아 당기며 직간(直諫)한 일. 중국 삼국시대 위(魏)의 신 비(辛毗)는 직간으로 유명하였다. 문제(文帝)가 기주(冀州)의 사가(士家) 10만 호를 하남(하南)으로 옮기려 하였는데, 그때 충해(蟲害)로 흉년이 잇달아 백성이 굶주리므로 여러 관사(官司)가다 불가하게 여겼으나, 문제는 뜻을 돌리지 않았다. 신 비가 조신(朝臣)들과 함께 문제를 만나기를 청하였는데, 문제가 간쟁(諫諍)하려는 것을 미리 알고 노한 기색으로 만나자, 아무도 말하지 못하였으나 신 비 만은 간언하였다. 문제가, "경(卿)과 의논하지 않겠다." 하매, 신 비가, "폐하께서 신을 불초(不肖)하게 여기지 않고 좌우에 두셨으니, 어찌 신과 의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말하는 것은 사사로운 일이 아니고 나라를 염려하는 것입니다. 어찌 신을 노여워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문제가 답하지 않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려 하매, 신 비가 문제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니, 문제가 옷을 떨치고 들어갔다가 한참만에 나와서 급히 말린 뜻을 물으매, 신 비가 민심도 잃고 백성이 먹고 살 길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하니, 문제가 반수만을 옮겼다. 《三國志 魏書 辛毗傳》 절함은 한(漢) 나라 때 주운(朱雲)이 임금에게 간(諫)하니, 임금이 화를 내어 끌어 내리려 하므로 어전(御殿)의 난간(欄干)에 올라가 버티다가 난간을 부러지게 한 고사를 가리킨다.《漢書 朱雲傳》

61) 마음을 터 놓고 사귀는 벗이란 뜻이다.

62) 관원을 임용할 때, 문신(文臣)은 이조(吏曹)에서, 무신(武臣)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세 사람을 갖추어 임금에게 올리는 일이다.

63) 우산(牛山)은 성 혼(成渾)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은 안방준(安邦俊, 1573(선조 6)∼1654(효종 5))의 호다.

64) 노 수신(盧守愼, 1515(중종 10)∼1599(선조 22)의 호. 그는 이 연경(李延經)의 문하생으로 27세 때 이 언적(李彦迪)과 학문을 토론하여 크게 개발되었고, 1543년(중종 38) 문과에 급제한 후 (正言)을 거쳐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이르렀을 때 을사사화로 파직되었다. 그는 또한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으로 진도(珍島)로 유배되어 19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그 동안에 그는 이 황(李滉) · 김 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여 주자(朱子)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 항(李恒)과 논쟁을 펴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辯)」을 저술하였으며, 사칠론(四七論)에 대해서도 기 대승(奇大升)과 의견을 교환하는 등 학문에 정진하였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불려나와 영의정 ·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냈다.

65) 관직이 없는 선비를 가리킨다.

66) 인물의 재능을 시험하여 뽑는 일이다.

67) 송 익필(宋翼弼, 1534(중종 29)∼1599(선조 32)의 호. 그는 이 이(李珥) · 성 혼(成渾)과 교유하며 성리학(性理學)에 달통하고 예학(禮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그의 문하에서 김 장생(金長生) · 정 엽(鄭曄) 등 여러 학자가 배출되었는데, 특히 김 장생은 그의 예학을 계승하여 조선 시대의 예학 대가가 되었다.

68) 송(宋) 나라 때 염계(濂溪) 주 돈이(周惇)의 문인이자 명도(明道) 정 호(程顥)의 아우인 정 이(程)의 호. 그의 학문은 성(誠)에 바탕을 두고 「대학」·「논어」·「맹자」·「중용」으로 지표를 삼았는데. 그 학통이 주자에게로 이어졌다.

69) 여기서 문신(文臣)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가리킨다.

70) 이조 좌랑의 추천을 가리킨다.

71) 행(行)은 품계(品階)가 높은 사람이 품계보다 낮은 직급(職級)에 보임된 경우를 나타내는 말이니, 행병판은 1품인 사람이 2품인 병조판서에 보임되었다는 뜻이다.

72) 성균관(成均館)의 별칭이다.

73) 임금에게 복명하는 일. 원칙적으로 중죄수(重罪囚)를 신중히 심리하기 위하여 초복(初覆). 재복(再覆), 삼복(三覆) 등과 같이 반복하여 상계(上啓)하는 일이다.

74) 여기서는 의정부(議政府)와 중추부(中樞府)에 딸린 아전을 가리킨다.

75) 선조 때의 명상(名相)이었던 유 성룡(柳成龍, 1542(중종 27)∼1607(선조 40))의 호. 자는 이현(而見)으로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도학·문장이 높아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76) 이 산해(李山海. 1538(중종 33)∼1609(광해군 1))의 호. 그는 대북(大北)이 다시 분당될 때 육복(肉北)의 영수로서 영의정에 오르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문장, 서화에 능하였다.

77) 김 우옹(金宇, 1540(중종 35)∼1609(선조 36)의 호. 자는 숙부(叔夫)로 1567년(명종 22)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그는 동인(東人)으로서 기축옥사 때 추방되어 회령(會寧)으로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풀려나와 비어기무(備禦機務) 7조를 건의한 일도 있다.

78) 입번(入番)할 차례에 입번하지 않은 대가로 바치는 무명배.

79) 변방수비군의 군량조로 확보한 곡식.

80) 조선조 세종 때 김 종서(金宗瑞)가 우리나라 최북단인 함경도의 북변을 개척하여 설치한 국방요새(國防要塞)로서 곧 경원(慶源)·온성(穩城)·종성(鍾城)·회령(會寧)·부령(富寧)·경흥(慶興)의 여섯 진.

81) 변경에 있는 오랑캐를 가리킨다.

82) 궁중에서 왕명을 전달하는 내시(內侍)

83) 여기서는 박 순(朴淳) 1923(중종 18)∼1589(선조 22))을 가리킴. 박 순은 자는 화숙(和叔)이며 서 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이 황(李滉)과 교유하였다. 1553년(명종 8) 문과에 급제한 후 1572년(선조 5) 우의정을 거쳐 1579년 영의정이 되었다. 퇴계와 율곡을 돕다가 서인(西人)으로 지목까지 받았고, 동서분당(東西分黨)이 되자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숨어 살았다.

84) 초기(草記)에 쓰이는 종이를 가리킨다.

85) 주자(朱子)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어서 엮은 편년사(編年史)의 하나인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말한다.

86) 대제학(大提學)의 별칭이다.

87) 궁중에 있는 부고(府庫)를 가리킨다.

88) 이 덕형(李德馨) 1561(명종 16)∼1613(광해군 5)의 자(字)다.

89) 여기서는 백사(白沙) 이 항복(李恒福)과 한음(漢陰) 이 덕형(李德馨)을 가리킨다.

90) 남을 혹독하게 저주(詛呪)하는 일이다.

91) 여기서는 율곡을 가리킨다.

92) 국가의 세입표(歲入表)로서 곧 조(租) · 용(庸) · 조(調)의 수입 일람표인데, 이것은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조선조 세조 때에 조정 확정된 것이다.

93) 율곡의 서자이다.

94) 저보(邸報) : 관보(官報)와 같은 것이다.

95) 영감(令監)과 같이 정 3품의 관원을 일컫던 말이다.

96) 조 식(曺植, 1510(연산군 7)∼1572(선조 5))의 호. 그는 반궁체험(反躬體驗)과 지경실행(持敬實行)을 학문의 목표로 하였고, 성리학(性理學)에도 능통하여 당시 유학계의 대학자로 추앙되었다.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 · 단성현감(丹城縣監) ·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자퇴하였다. 만년에는 두류산(頭流山) 덕산동(德山洞)에 들어가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그의 문하에서 김 효원(金孝元)·김 우옹(金宇) 등 훌륭한 학자들을 배출시켰다.

97) 어느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오직 공평한 입장을 지키는 일이다.

98) 송(宋) 나라 선종(禪宗)의 연호(1063∼1077). 송나라에서는 이 연간에 신법(新法)을 창설한 왕 안석(王安石)을 주축으로 한 신당(新黨)과 신법을 반대한 사마광(司馬光)을 중심으로 한 구당(舊黨)이 대립하여 당쟁이 격렬하였다.

99) 서로 시새워서 미워하는 일이다.

100) 명교(名敎)로써 언행(言行)를 검속(檢束)하는 일이다.

101) 1577년(선조 10) 율곡이 어린이의 교육을 위하여 편찬한 책. 내용은 입지(立志) · 혁구습(革舊習) · 지신(持身) · 독서(讀書) · 사친(事親) · 상제(喪制) · 제례(祭禮) · 거가(居家) · 접인(接人) · 처세(處世) 등 10장으로 나위었으며, 사당도(祠堂圖) · 시제도(時祭圖) · 설찬도(設饌圖)와 참례의(參禮儀) · 천헌의(薦獻儀) 등이 책 끝에 첨부되었다.

102) 원(元) 나라의 대학자인 허 형(許衡)의 호. 자는 중평(仲平)으로 어릴 적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학문에 열중하였고, 정자(程子)·주자(朱子)의 글을 더욱 즐겨 읽었다. 요 추(姚樞) · 두 묵(竇默)과 서로 강습(講習)하여 경전(經傳) · 자사(子史) · 예악(禮樂) · 명물(名物) · 성력(星曆) · 병형(兵刑) · 식화(食貨) · 수리(水利) 등에 두루 통하였고, 벼슬은 세조(世祖) 때 국자제주(國子祭酒)·중서 좌승(中書左丞)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는 「독역사언(讀易私言)」·「노재심법(魯齋心法)」 등이 있다. 《元史 一白五十八, 宋元學集 九十》

103) 연보에 의하면, 율곡이 40세 때 사서의 소주(小註)에 주묵(朱墨)으로 비말(批抹)하여 그 득실을 정정하였는데. 「논어」와 「맹자」는 임진 병화에 잃어버리고 「중용」,「대학」만이 남아 있다 하였다.

104) 율곡이 46세 때 쓴 「경연일기(經筵日記)」를 가리킨다.

105) 세상에 드문 뛰어 난 기품이란 뜻이다.

106) 눈에 드는 글이 없어 웬만한 글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107) 아무리 입어도 싫증이 나지 않은 포백(布帛)의 옷이나 항시 먹어도 물리지 않은 숙속(菽粟)의 음식과 같은 글이란 뜻이다.

108) 성천(成川)은 성천 고을의 원임을 나타내고, 입지(立之)는 최입(崔)의 자(字)이다.

109) 서예가.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 1567년(명종 22)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후 사어(司禦)에 이어 가평군수(加平郡守)·흡곡현령(谷縣令)·존숭도감 서사관(尊崇都監書寫官) 등을 역임하였고, 명(明) 나라에 파견되는 사절을 수행하거나 명나라 사신을 맞을 대의 연회(宴會)에서 정묘한 필치로 좌중을 매혹시켜 동양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글씨는 최 입(崔)의 글 · 차 천로(車天輅)의 시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일컬어졌다.

110) 남의 문장의 고귀함을 가리킨다.

111) 여기서는 남의 인격의 고결함을 비유한 것이다.

112) 좋은 말을 하여 줌, 곧 글 같은 것을 지어 주는 일을 가리킨다.

113) 여기서는 글의 초솔(草率) 함을 기리킨다.

114) 발 밑. 곧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115) 수주(隋珠) · 화벽(和璧)은 다 같이 천하의 보배로 여기던 구슬과 옥. 수주는 수후(隋候)가 장차 끊어진 큰 뱀을 약으로 치료해 보냈더니, 그 뱀은 뒤에 큰 구슬을 물고 와 보은하였는데, 그 구슬은 마치 달빛처럼 광채가 났다 하며, 화벽은 초(楚) 나라 때 변 화(卞和)라는 사람이 초산(楚山)에서 얻은 옥을 가리킨다.

116) 기증(寄贈)이란 말과 같다.

117) 여기서는 같은 시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방목(榜目)에 같이 적힌 동료를 가리킨다.

118) 시가(詩歌)를 가리킨다.

119) 시(詩)를 지어 서로 주고 받는 일이다.

120) 이 행(李荇, 14789성종 9)∼1534(중종 29))의 호, 1495년(연산군 1) 과거에 급제한 후 대사간 · 대사헌 · 공조참판 · 대제학 등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고, 특히 문장과 서화에 뛰어나 중국 사신을 감탄케 한 일이 있기도 하였다.

121) 정사룡(鄭士龍, 1491(성종 22)∼1570(선조 3))의 호. 1509(중종 4)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대제학 등을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특히 시문(詩文)·음률(音律)에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하였다. 중국사신이 왔을 대 훌륭한 문필로 그들을 감복시킴으로써 그들의 추천에 의해 벼슬이 높아지기도 하였다.

122) 산하간기(山河間氣)·삼대인물(三代人物) 이란 산하의 정기를 타고 났으며, 하(夏) · 은(殷) · 주(周) 삼대 적의 훌륭한 인물이란 뜻이다.

123) 작고한 선생·여기서는 율곡을 가리킨다.

124) 송(宋)의 학자이자 이천(伊川) 정 이(程)의 형인 정 호(程顥)는 호가 명도(明道)로서 자성과인(資性過人)하고 충양유도(充養有道)하여 마치 따스한 봄바람과 같은 온후장자(溫厚長者)라는 평을 받았다.

 

(이글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나온 '율곡전서'를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