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행장(先비行狀)

 

신 사임당은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막상 그의 행적과 예술에 대해서 자세히 또 정확히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혹시 그가 율곡 선생 같은 위대한 인물을 낳은 어머니였기 때문에 유명해졌다고도 하지만, 반면에 만일 사임당같은 훌륭한 어머니를 가지지 못했더라면 율곡이 또한 그같이 위대한 인물이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의 아버지는 평산 신씨로서, 이름은 명화이며, 멀리 고려 태조의 충신이었던 장절공 신 숭겸의 18대손인 훌륭한 가문이었다. 다섯 따님 중 둘째였던 사임당은 총명하고 천부의 자질이 뛰어났으며, 집에 아들이 한 사람도 없었기에 어려서부터 남달리 유교의 경전과 명현들의 문집 등 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점은 이문열의 책 '선택'에 나오는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와 마찬가지로 모두 교육을 통해 지혜로운 어머니이자 어진 아내가 되었고, 교육을 통해 자식들을 모두 훌륭하게 길러냈다.

시와 문장에 능했으나 남은 작품은 2편의 시문과 낙귀 뿐이다.

 

 

사임당자당(慈堂)의 휘는 모(某)로 진사 신공(申公)51)의 둘째 딸이다.

어렸을 때에 경전(經傳)을 통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또한 바느질도 잘하고 수놓기까지 정묘(精)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천성도 온화하고 얌전하였으며 지조가 정결하고 거동이 조용하였으며 일을 처리하는데 안존하고 자상스러웠으며, 말이 적고 행실을 삼가고 또 겸손하였으므로 신공이 사랑하고 아꼈다.

성품이 또 효성스러워 부모가 병환이 있으면 안색이 반드시 슬픔에 잠겼다가 병이 나은 뒤에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가군(家君)에게 이미 시집을 오게 되자 진사 신공이 가군에게 말하기를, "내가 딸이 많은데 다른 딸은 시집을 가도 서운하질 않더니 그대의 처만은 내 곁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네 그려."라고 하였다.

신혼을 치른 지 얼마 안 되어 진사가 작고하니 상을 마친 뒤에 신부의 예로써 시어머니 홍씨(洪氏)를 서울에서 뵈었는데, 몸가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하루는 종족들이 모인 잔치 자리에서 여자 손님들이 모두 이야기하며 웃고 하는데 자당만 말없이 그 속에 앉아 있자 홍씨가 자당을 가리키며, "새 며느리는 왜 말을 않는가." 하셨다. 그러자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여자는 문밖을 나가 본 적이 없어서 전혀 본 것이 없는데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하니, 온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그 뒤에 자당께서 임영(臨瀛:강릉의 고호)으로 근친(覲親)을 가셨는데 돌아오실 때에 자친(慈親)과 울면서 작별을 하고 대령(大嶺: 대관령) 중턱에 이르러 북평(北坪) 땅을 바라보고 백운(白雲)의 생각52)을 견딜 수 없어 가마를 멈추게 하고 한동안 쓸쓸히 눈물을 짓고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踰大關嶺 望親庭)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慈親鶴髮 在臨瀛

서울을 향하여 홀로 가는 이 마음 身向長安 獨去情

돌아보니 북촌(오죽헌)은 아득도 한데 回首北村 時一望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白雲飛下 暮山靑

 

한성에 이르러 수진방(壽進坊)에서 살았는데 이때에 홍씨는 늙어 (때는 신축년(1541)) 가사를 돌보지 못하셨으므로 자당이 맏며느리 노릇을 했다.

가군은 성품이 호탕하여 세간살이를 불고하였으므로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려웠는데 자당이 절약하여 윗분을 공양하고 아랫사람을 길렀는데 모든 일을 맘대로 한 적이 없고 반드시 시어머니에게 고하였다.

그리고 홍씨의 앞에서는 희첩(姬妾: 시중드는 여종)도 꾸짖는 일이 없고 말씀은 언제나 따뜻하고 안색은 언제나 온화했다. 가군께서 어쩌다가 실수가 있으면 반드시 간하고 자녀가 잘못이 있으면 훈계를 하였으며 좌우가 죄가 있으면 꾸짖으니 종들도 모두 존경하며 떠받들고 좋아했다.

자당이 평소에 항상 임영을 그리워하여 밤중에 사람 기척이 조용해지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어떤 때는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루는 친척 어른되는 심공(沈公)의 시희(侍姬)가 찾아와 거문고를 뜯자 자당께서는 거문고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거문고 소리가 그리움이 있는 사람을 느껍게 한다."고 하셨는데, 온 방 사람들이 슬퍼하면서도 그 뜻을 몰랐다.

또 일찍이 어버이를 생각하는 시를 지었는데 그 글귀에,

 

어머니 그리워(思 親)

산첩첩 내고향 천리연마는 千里家山萬疊峰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歸心長在夢魂中

한송정(寒松亭) 가에는 외로이 뜬 달 寒松亭畔孤輪月

경포대(鏡浦臺) 앞에는 한줄기 바람 鏡浦臺前一陣風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락 모이락 沙上白鷗恒聚散

고깃배는 바다위로 오고가리니 海門漁艇任西東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何時重踏臨瀛路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更着斑衣膝下縫

 

낙 귀(落 句)

밤마다 달을 보고 비노니 夜夜祈向月

생전에 뵈올 수 있게 하소서 願得見生前

 

하였으니, 대체로 그 효심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당은 홍치(弘治) 갑자년(1504) 10월 29일에 임영에서 태어나 가정(嘉靖) 임오년(1522)에 가군에게 시집을 오셨으며 갑신년(1524)에 한성으로 오셨다. 그 뒤에 임영으로 근친을 가 계시기도 했고 봉평(蓬坪)에서 살기도 하다가 신축년(1514)에 다시 한성으로 돌아오셨다.

경술년(1550) 여름에 가군이 수운판관(水運判官)에 임명되었고, 신해년(1551) 봄에는 삼청동(三淸洞) 우사(寓舍)로 이사를 했다. 이해에 가군이 조운(漕運)의 일로 관서(關西)에 가셨는데 이때 아들 선(璿)과 이(珥)가 모시고 갔다.

이때에 자당은 수점(水店)으로 편지를 보내시면서 꼭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썼는데 사람들은 그 뜻을 몰랐다.

5월에 조운(漕運)이 끝나 가군께서 배를 타고 서울로 향하였는데, 당도하기 전에 자당께서 병환이 나서 겨우 2∼3일이 지났을 때 모든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살지 못하겠다." 하셨다. 밤중이 되자 평소와 같이 편히 주무시므로 자식들은 모두 병환이 나은 줄로 알았는데 17일(갑진) 새벽에 갑자기 작고하시니 향년이 48세였다.

그날 가군께서 서강(西江)에 이르렀는데 이(珥)도 배행했다.

행장 속에 든 유기 그릇이 모두 빨갛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괴이한 일이라고 했는데 조금 있다가 돌아가셨다는 기별이 들려왔다.

자당은 평소에 묵적(墨迹)이 뛰어났는데 7세 때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山水圖)를 그린 것이 아주 절묘하다.

또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시늉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 그림을 모사(模寫)한 병풍이나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

 

< 주 >

51) 이이(李珥)의 외조부인 진사 신명화(申命和)를 가리킨다. 자세한 것은 다음 신공 행장(申公行狀)에 나타나 있다

52) 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태행산(太行山)에 올라가 흰 구름(白雲)을 바라보며 "저 구름 아래 우리 아버지가 계신다" 하고 섰다가 구름이 옮겨간 뒤에야 그 곳을 떠났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어버이를 생각하는 뜻으로 쓰인다. 《唐書 狄仁傑傳》

 

(이 글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나온 '율곡전서'를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