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애(松崖)에 대한 기문

 

해주의 풍암 아래를 송애(松崖: 소나무 절벽)라 이름 짓고 그곳을 유람한 내용이다.

 

내가 본래 풍암(楓巖) 하류(下流)에 경치 좋은 곳이 많다고 들었으나 아직 유람하는 발길이 미치지 못하였다가, 신미년(1571) 6월 10일 경에 6∼7 명의 벗과 더불어 시내를 따라 올라갔다.

숲으로 덮인 산맥이 방류 위이(旁流위이)하여 혹은 솟고 혹은 엎드린 것으로 보아서, 높은 곳에는 반드시 푸른 언덕이 있어 병풍과 같고 그 아래는 반드시 고인 물이 못을 이루었을 터인데, 객중(客中)에 이 물의 근원을 아는 이가 있어서 그 수효가 아홉임을 알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구곡(九曲)이었다.

우리는 걸어서 제 4담(潭)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경치가 가장 좋은 곳이라 하기에 모래 위에 자리를 펴고 푸른 언덕을 마주하여 앉으니, 물이 넓어 배를 띄울 만하고 언덕 밑에는 어지러운 돌이 서로 뒤섞인 가운데 바위 하나가 배와 같기에 이름을 '선암(船岩)'이라 하였는데, 4∼5명이 앉을 만하니, 시골 늙은이의 낚시터이기도 하였으리라.

바위틈을 우러러보니, 제비집이 있었다. 우리는 제비가 머물 데를 알아서 머물 줄 안 것을 기이하게 여기었다. 객(客)이 있어 그 곳의 이름을 청하기에 내가 '송애(松崖)'라 이름하였으니 언덕 위에 소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언덕 왼편으로 옛 절터가 있었는데 나무 그늘이 매우 우거져 바라다보면 아득하기만 하였다. 우리가 옷을 걷고 올라 보니, 절이 없어진지 오래되어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건장한 종을 시켜 풀을 베고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바위의 언저리를 더위잡고 올라가자니 대단히 험준하였다. 작은 언덕 측면에 하나의 구멍이 있는데, 그 밑바닥을 볼 수 없었다.

다 올라가 보니, 높은 섬돌이 그대로 남아 있고, 석천(石泉)이 아주 차가웠다. 아래로부터 그 높이를 추측하여 보니, 대개 6분의 4 쯤 되는데 시야는 매우 넓었으나 마침 구름이 끼어 멀리 바라볼 수 없었다.

 객이 저 멀리 구름 밖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우이산(牛耳山)과 불족산(佛足山) 등이 저기에 나란히 있고, 절의 옛 이름은 '갈공(葛公)'이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갈공은 의미가 맞지 않다. 초암(草庵)을 짓고 그 이름을 고쳐 '가공(架空)'이라 하라." 하였다.

우리는 이리저리 배회하며 두루 돌아보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아! 외물(外物)의 즐거워할 만한 것은 모두 참다운 즐거움이 아니다. 군자의 즐거워하는 것은 안에 있고 밖에 있지 않으므로 저 솟은 봉우리와 흐르는 물 등은 다 나에게 관계가 없는 것인데, 옛 성현이 오히려 이를 즐거워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대개 내외(內外)를 나누어서 둘로 보는 것은 참다운 즐거움을 아는 이가 아니다. 반드시 내외를 하나로 하여 피차가 없는 이라야 참다운 즐거움을 아는 것이다.

천리(天理)는 본래 내외의 간격이 없는 것인데, 저 안이 있고 밖이 있는 것은 반드시 인욕(人欲)이 개재하였기 때문이다. 진실로 인욕의 개재가 없다면 바로 호연자득(浩然自得)할 터이니, 어디를 간들 즐겁지 않겠는가!

옛적에 증 석(曾晳)이 기수(沂水)에 목욕하겠다고 하자 부자(夫子)가 감탄하며 깊이 허여(許與)하였는데, 이는 증 석이 인욕(人欲)이 없는 곳에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하는 묘리(妙理)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성남(城南: 기수가 노(魯) 나라 성의 남쪽에 있으므로 일컫는 말)의 목욕과 단상(壇上: 하늘에 제사하며 비를 빌던 무우(舞雩)에 재단이 있으므로 일컫는 말)의 읊음은 노(魯)나라 사람이면 다같이 하는 일인데, 어찌 낱낱이 다 허여하겠는가.

그러나 천리(天理)의 현묘(玄妙)는 배우는 이의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리의 현묘를 보고자 한다면 마땅히 신독(愼獨: 혼자 있는 곳에서 더욱 삼가는 공부)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신독에 입각하면 내 마음에 간격이 없고 내 마음에 간격이 없으면 천리가 유행한다. 신독에 입각하지 않으면 내 마음에 간격이 있고 내 마음에 간격이 있으면 천리가 막히기 때문이니, 우리 무리(吾黨)의 선비들은 여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