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 서원(道峯書院)에 대한 기문(道峯書院記)

 

도봉서원(道峯書院)은 서울 도봉구 도봉동에 있는 것으로 1573년(선조 6년)에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창건 때 '도봉(道峯)'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고, 1696년에는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하였다.

 

도봉서원서원을 세우는 일은 본래 장수(藏修:학업을 닦는 일)와 아울러 선현의 덕을 높이고 공을 보답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고장의 향선생(鄕先生)중에 후학의 모범이 될 만한 이를 찾아 사우(祠宇)를 세우고 경모(敬慕)를 다하여 많은 선비들의 현인 되기를 희망(希望)하는 뜻을 흥기시키는 것이다.

정암(靜菴)선생 조 문정공(趙文正公)은 본관이 한산(漢山)이다. 한산은 본래 양주(楊州)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도성으로 편입되었다. 양주읍 남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도봉산(道峯山)이 있고 거기에 영국동(寧國洞)이 있는데, 옛날에 영국사(寧國寺)가 있다가 지금 절은 없어지고 동의 이름만 그대로 전해진다.

선생이 소시(少時)에 이 동중의 천석(泉石)을 무척 좋아하여 왕래 휴식하였고 조정(朝廷)에 있을 때도 공무가 끝나는 틈을 타 이곳을 찾아 노닐었으므로 지금에도 시골 노인 중에는 이러한 옛말을 하는 자가 있다.

만력(萬曆) 계유년 (1573) 겨울에 목사(牧使) 남 언경(南彦經)이 이곳을 찾아보고 개연(慨然)히 선생의 유적을 회상하고는 시골의 선비들을 찾아서, 경모(敬慕)할 사우를 만들 것을 의논한 바, 중지(衆志)가 일치되었다. 바로 옛 절터에 사우를 건립하고 이어 서원(書院)을 시설하니 향인들이 분발하고 공인(工人)들이 노력하여 이듬해 여름에 사우와 서원이 완공되었다.

사우는 북쪽에 위치하여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보조 건물을 삼았고, ,서원은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가운데에 강당을 설치하고 그 양쪽에는 두 협실(夾室)로 배치하고 전랑(前廊:앞에 있는 행랑)은 시내를 내려다보고 낭사(廊舍) 옆에는 문이 있으니, 모두 지형을 따른 것이다.

목수의 역사(役事)만이 대강 완공되었을 뿐, 나머지 모든 일이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남 목사(南牧使)는 병으로 인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후임으로 온 목사 이 제민(李齊閔)과 또 그 뒤를 이은 이 정엄(李廷 )이 이 사업을 잘 계승 수행하였다. 선비에게 급여할 녹미와 서적을 보관할 서실과 제물을 차릴 주방 등이 차례로 형성되었다. 6년째 되는 기묘년(1579) 봄에 비로소 일손을 떼게 되었다.

낙성식에 앞서 서원의 유생 안 창(安昶)이 많은 선비들의 소청으로 나에게 기문을 청하여 왔다. 이(珥)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지금 문형(文衡)의 대가들이 한두 명이 아닌 터에 바닷가의 마르고 병든 늙은 이의 붓을 반드시 빌어 유림의 성대한 행사를 표장(表章)하려는 본의가 어디에 있을까. 혹 이(珥)가 선생의 끼치신 은택을 받아 이 학문의 조박(糟粕)이라도 대강 체득했다고 잘못 생각한 것이나 아닐까, 이(珥)는 너무 부끄러워 감히 감당하지 못할 일이다.

다만 영국(寧國)의 동학(洞壑)은 암석이 깨끗하고 물이 맑아 한 구역의 승지를 이루었고, 현인의 사우와 유교의 서원이 일시에 새로이 갖추어져 있어 많은 유생들이 모여 든 지 몇 해가 되었는데 한 번도 관람하지 못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신병이 있어 직접 찾아 갈 수 없고, 다만 이름만이라도 그 사이에 끼이게 되는 것을 지극한 영광으로 여기기 때문에 참람되고 망령됨을 잊고 한 마디 말을 덧붙이려 한다.

우리나라가 본래 문헌(文獻)의 나라로 일컬어지고 있기는 하나 고려〔王氏〕이전에는 소위 학문이라는 것이 미사(美辭)를 조작하고 여구(麗句)를 추구하였을 뿐, 성리(性理)에 관한 담론은 전연 들을 수 없다가 그 말엽에 와서 정 포은(鄭圃隱)이 비로소 이학(理學:성리학)의 시조로 일컬어지기는 하나 그 언론과 풍지(風旨)는 상세히 알 수 없었고, 후인들이 다만 한 몸으로 5백 년 동안의 퇴폐하고 파괴된 강상(綱常)을 떠받쳤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우리 본국에 들어와서는 문풍(文風)이 취규(聚奎)하던 운(運)95)을 이었으나 능히 위기(爲己)의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난 이는 역시 배출되지 않았다.

오직 우리 정암 선생만이 그 단서를 한훤당(寒喧堂) 문경공(文敬公)에서 얻어 독실한 행의가 더욱 힘차고 스스로의 체득이 한층 깊어, 몸가짐은 반드시 성인이 되고자 하였고 조정에 서서는 반드시 도를 행하고자 하였으니, 정성스럽게 힘쓴 바는 군심(君心)을 바로잡고 왕정(王政)을 개진하며 도의의 길을 열고 이욕의 근원을 막는 일로 선무(先務)를 삼았다.

이를 창조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선비의 기풍(氣風)이 크게 달라졌는데, 하늘이 송(宋:조선 중종 시대를 중국 송나라에 비유하는 말)나라를 돕지 아니하여 음흉하고 간특한 일이 비록 당시에 조작되기는 하였지만, 그 유풍(流風) 여운(餘韻)이96) 5세도 못되어 양광(陽光)이 오늘에 와서 발하기 시작하였다. 후세의 선비된 자가, 어버이는 버릴 수 없음과 임금은 뒤로 미룰 수 없음과 의리는 버릴 수 없음과 이욕은 취할 수 없음과 제사에는 경건을 생각하고 상사(喪事)에 슬퍼할 줄 아는 것은 다 우리 선생의 가르침 때문이다. 진실로 그 공적을 논하고 그 은덕을 보답하려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 사실을 분명히 간파하고 이 아름다운 일을 시작한 것은 매우 높일 만한 일이다.

이(珥)는 이로 인하여 가만히 느끼는 바가 있다. 선생이 평소에 사람을 교훈한 일은 다만 위기(爲己)의 학문을 힘쓰는 데 있었을 뿐, 시문을 익혀 벼슬자리를 구하는 일에는 그저 범연하였다.

이 서원에 기거하는 후학이 진실로 세속의 풍습을 일체 제거하고 한결같이 거경(居敬)·궁리(窮理)·역행(力行)하는 것으로 심조(深造:쉬지 않고 공부하는 것)하는 공정(功程)을 삼아 서로 관감(觀感)하고 서로 책선(責善)하여 거안 자심(居安資深:이치에 안착하고 수용함이 깊음)의 경지로 나아간다면 선생의 은혜를 능히 보답한다 이를 것이며, 묘정(廟庭)을 첨배(瞻拜)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한다며 선생의 도가 비록 전에는 비색하였으나 뒤에 와서 실현되는 셈이니, 어찌 사문(斯文)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만약 입지(立志)가 독실하지 못하고 구습(舊習)이 작용되어 문사(文辭)나 짓고 필묵이나 희롱하여 과시(科試)만을 희망하고, 주리면 먹고 배부르면 희유(嬉遊)하여 얼마 안 되는 시각이라 해서 아끼지 않는다면 선생을 저버린 바가 크다. 무슨 면목으로 묘문 안으로 떳떳이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되면 선생의 도는 이미 옛날에 궁하였고 또 지금에 와서도 폐기되는 셈이니, 어찌 애통스럽지 않으랴. 아! 후생은 이를 생각해야 한다.

서원(書院)의 규약은 제생(諸生)들이 부제학(副提學) 초당(草堂) 허공 엽(許公曄)에게 품의하여 정하였다.

이 공사에 사문(斯文)의 선후배가 다 함께 비용을 도왔지만 허공이 실로 이에 앞장섰고 그밖에 우참찬(右參贊) 백공인걸(白公仁傑)과 이조참판(吏曹參判) 박공 소립(朴公素立)의 공 또한 딴 사람들보다 특이하였다.

 

< 주 >

95) 규성은 서방에 있는 별로 문운(文運)을 주장한다고 한다. 「송사(宋史)」 두엄전(竇儼傳)에, "정묘년에 5성(星)이 규성에 모였는데, 천하가 이로부터 태평했다."하였다.

96)「맹자」이루 하(離婁下)에 "군자(君子)의 유풍(流風)도 5세가 되면 끊어지고 소인(小人)의 유풍도 5세가 되면 끊어진다." 는 데서 인용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