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실기(箕子實記)

 

이 글은 율곡이 45세에 지은 것으로, 기자에 대하여는 공자가 삼인(三仁)의 한 사람으로 칭한 것이 논어에 보이고, 역경(易經)의 명이 괘(明夷卦)에도 보인다. 인인군자(仁人君子)로 알려지고 있다.

 

기자는 상(商) 나라의 종실(宗室)이다. 혹 말하기를 이름은 서여(胥餘)라고 한다.

학문은 구주(九疇)1)를 밝혔고, 몸은 성인의 도를 전하였다. 기내(畿內)의 제후(諸侯)2)로서 벼슬하여 태사(太師)3)가 되었다.

제을(帝乙)4)의 적자(嫡子:정실의 몸에서 난 아들.)인 수(受: 주(紂)의 이름. 일명은 신(辛))는 타고난 말솜씨가 좋아서 간하는 말을 거절하고 그릇된 것을 옳다고 꾸며대었으며, 그 서형(庶兄)인 계(啓: 미자(微子))는 공손하고 삼가며 효성스러웠다.

기자 생각에, 수는 임금이 될 만한 원량(元良)5)이 아니며 계는 연장이면서도 현명하다고 여겼으므로 제을(帝乙)에게 그를 임금자리에 앉히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제을은 적자(嫡子)를 폐하기가 어렵다 하여 마침내 수를 세워 태자(太子)를 삼고 계를 봉하여 미자(微子)로 삼았다.

제을이 죽자 수가 즉위하여 호(號)를 주(紂)라고 하였다.

주가 처음에 상아젓가락[象箸]을 만들자, 기자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임금이 상아젓가락을 만드니 또 반드시 옥잔[玉杯]을 만들 것이고, 옥잔을 만들면 반드시 먼 방의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을 구하여 사용하려 들 것이다. 수레와 말, 궁실 치장에 이르기까지 발단이 이로부터 비롯되어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고 하였다.

주의 음란하고 잔학함이 날로 심하여 가자, 미자는 은(殷)6)이 장차 망할 것을 슬퍼하며 기자와 소사(小師)7)인 비간(比干)8)에게 상의하였다. "이제 은나라가 망하여 가는 꼴이 마치 큰 물을 건너는데 배 댈 언덕도 나루도 없는 것과 같구려……. 이와 같은 형세인데도 그대들은 나에게 멸망에 대한 대책을 일러줌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기자는 말하기를, "상(商)나라는 이제 재앙이 없을 것이니, 우리는 모두 패망하게 될 것이다. 상나라가 패망하여 없어진다 하여도 나는 단연코 타인의 신복(臣僕)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왕자께 떠나감이 도리임을 알리오니, 내가 전에 제을에게 주를 세우지 말고 왕자를 세우라고 말한 것이 왕자를 해치게 되었다. 왕자가 떠나지 않으면 우리는 완전히 몰락하고 말 것이니 각자 마땅히 행해야 할 의리를 행함으로써 그 충의를 선왕께 바쳐야 할 것이다. 나는 은둔(隱遯)할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미자는 이에 떠났다. 기자가 주를 간하였으나 주는 듣지 않고 기자를 가두어 종으로 삼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떠나가는 것이 옳다"라고 하자 기자는 이르기를, "남의 신하가 되어 간하는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버리고 간다면, 이것은 임금의 악을 드러내고 스스로 백성에게 환심을 사는 것이니, 나는 그런 짓은 차마 하지 못한다." 하고는, 이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여 갖은 곤욕을 당했으며 거문고를 타며 스스로 슬퍼하였다. 그러므로 이를 기자조(箕子操)9)라고 전해 온다.

비간은 끝내 간하여 마지아니하였으므로 주는 그를 죽이고 말았다.

주무왕(周武王)10)이 상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고 소공 석(召公奭)11)을 명하여 옥에 갇힌 기자를 풀어주게 하였다. 그리고 왕이 나아가 그를 만나 마음을 비우고 은나라의 망한 까닭을 물으면서 "내가 주를 죽인 것이 옳은가요. 그른가요." 하였다. 기자는 차마 말하지 못하였다.

왕은 이에 천도(天道)에 관하여 물으셨다. "아! 기자여, 하늘이 은연중에 아래 백성들을 안정되게 하시어 그들의 삶을 보살펴 주고 평화롭게 하셨는데 나는 그 이륜(彛倫)을 어떻게 제정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기자는 그제서야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듣건데 옛적에 곤(곤)12)은 홍수(洪水)를 다스리는데 있어 오행(五行)13)의 차서를 어지럽혔습니다. 상제(上帝)께서 이에 진노(震怒)하시어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내려 주시지 않으시매, 이륜(彛倫)이 무너졌습니다.

곤은 문책 되어 죽고, 우(禹)가 이에 치수(治水)를 계속하자, 하늘이 우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주시니, 이륜이 차례대로 펴졌습니다."

이윽고 홍범(洪範)에 대하여 설명하였는데, 그 대목(大目)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오행(五行)이고, 둘째는 공경하되 오사(五事)14)로써 하는 것이며, 세째는 농사(農)에 팔정(八政)15)으로써 하는 것이고, 네째는 부합(協)함을 오기(五紀)16)로써 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건립(建立)함을 황극(皇極)17)으로써 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다스림[乂]을 삼덕(三德)18)으로써 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명철(明)함을 계의(稽疑)19)로써 하는 것이고 여덟째는 고려(念)함을 서징(庶徵)20)으로써 하는 것이며, 아홉째는 누림(嚮)을 오복(五福)21)으로써 하고 위협(威)함을 육극(六極)22)으로써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황극(皇極)을 논한 것을 보면 "치우치거나 그릇됨이 없이23) 왕의 의(義)를 따를 것이며, 사사로이 좋아하는 바 없이 왕의 도리를 따를 것이며, 사사로이 싫어하는 바 없이24) 왕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치우침도 없고 사사로움도 없어야25) 왕도(王道)가 평탄해지고, 사사로움도 없고 치우침도 없어야 왕도가 평평해지며,26) 어김이 없고 그르침이 없어야27) 왕도가 정직28)해질 것입니다. 천자가 신하를 모으는 데도 법칙이 있어야 하고, 신하들이 천자에게 붙좇음에도 법칙이 있어야 합니다."29)고 하였다.

기자는 무왕을 위하여 도를 전해 주었으나 벼슬은 하려고 들지 않았고, 무왕도 또한 감히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았다. 기자는 이에 중국을 피하여 동쪽으로 조선에 들어왔는데, 따라온 중국인이 5천명이었다. 시(詩)·서(書)·예(藝)·악(樂)과 의(醫)·무(巫)·음양(陰陽)·복서(卜筮:주역.점술)의 무리와 백공기예(百工技藝)들이 모두 따라왔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는 그를 조선에 봉하여 평양에 도읍케 하였다. 처음 와서는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통역을 해서 알 수 있었다. 백성에게 예의 · 농업 · 잠업 · 직조 · 제작과, 경계를 구획 구분하는 정전(井田)30)의 제도 등을 가르치고 금기하는 법령 8조목31)을 베풀었으니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남을 죽인 자는 목숨으로 죄값을 보상하고, 남을 상해하는 자는 곡식으로 보상하며, 남의 것을 도적질한 자로 남자는 잡아 그 집의 종을 삼고, 여자도 종으로 삼았다. 스스로 속죄(贖罪)하려는 자는 50만을 바쳐야 하는데, 비록 죄는 면한다 하여도 백성들의 풍속에는 수치스럽게 여겼으며, 시집가고 장가드는 데 매매하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때문에 백성은 도적질을 하지 않아, 대문이나 지게를 닫는 일이 없게 되고, 부인은 마음이 곧고 신의가 있어 경솔하거나 사특하지 않았다. 시골이건 도시이건 음식을 먹을 때 변두(변豆)를 사용하였으며 신의와 겸양(謙讓)을 숭상하고 유술(儒術)에 전일(專一)하여 중국의 풍습을 점차로 이루었다.

전쟁하는 것은 숭상하지 말도록 가르쳐서 덕을 가지고 강포(强暴)한 것을 복종하게 하자, 이웃나라들이 모두 그 의(義)를 사모하여 찾아와 붙좇았다. 의관의 제도는 모두 중국과 똑같이 하였다.

그 뒤에 기자가 주(周)나라 임금을 뵈오로 갔을 때 은나라 옛터를 지났는데, 궁실이 무너져서 벼와 기장이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보고, 기자는 이를 서러워하며 맥수(麥秀:보리가 자라 나는 것)32)의 노래를 지었다.

 

보리이삭 잘도 자라고 麥秀漸兮

벼와 기장만 윤이 나네 禾화油兮

저 교활한 아이여33) 彼狡童兮

나와 의 좋지 않았도다 不與我好兮

은나라 유민(遺民)들은 이 노래를 듣고서 눈물을 흘렸다.

조신이 인현(仁賢)의 교화를 입어 시서(詩書) · 예악(禮樂)의 나라가 됨에, 조정이나 민간이나 아무 일이 없어져서 백성들이 기뻐하여 대동강을 황하(黃河)에 견주고 노래를 지어 그 덕을 기리었다.

기자가 죽은 뒤, 기씨(箕氏)가 대대로 동녘땅의 임금이 되었다. 주 나라 말기에 연백(燕伯:주(周)의 제후. 연땅의 백작(伯爵)이 왕이라 일컫고 장차 동쪽으로 국토를 침략하려 하자 조서후(朝鮮侯)34)도 군사를 일으켜 연 나라를 정벌하여 주 나라를 높이려 하였다. 그러나 대부(大夫) 예(禮)가 이를 간하여 중지하였으며, 예를 서쪽으로 보내어 연 나라를 달래니 연 나라도 역시 중지하고서 침범하지 않았다. 조선후도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그 후에 자손이 차츰 교만하고 포학하여 연 나라가 이에 장수(진개(秦開)를 가리킴.)를 보내어 그 서 쪽을 공격하여 2천 여리의 땅을 빼앗고 만반한(萬潘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으니 조선이 드디어 쇠약하여졌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병탄(幷呑)한 뒤에 장성(長城:만리장성을 가리킴.)을 쌓아 요동(遼東)에까지 이르렀지만 조선왕 비(否)는 진 나라를 두려워하여 붙좇았다.

비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왕위에 오른지 10여년이 되어서 진 나라가 멸망하니 연(燕)·제(齊)·조(趙) 등의 백성이 많이 도망쳐 조선을 들어왔다. 그 후 노 관(盧 )35)이 연 나라의 왕이 되었는데, 조선은 연 나라와 패수(浿水)36)로 경계를 삼았었다. 노 관이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연 나라 사람 위 만(衛滿)이 도망하여 무리 1천여인을 모아가지고 동으로 폐수를 건너와 서쪽 경계에 거처하여 번병(藩屛:울타리와 병풍처럼 국경을 지켜주는 구실)이 되기를 자청하여왔다. 조선왕 준(準)은 이를 곧이 듣고 박사(博士)로 삼고 규(圭)37)를 하사하여 1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두리를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위 만은 죄 짓고 도망하는 오는 축을 꾀어 들여 무리가 점차로 많아지자, 사람을 보내어 조선왕 준에게 거짓 보고를 하여 한 나라 군사가 10개 도로로부터 이르고 있으므로 들어와서 숙직하여 방위하고자 한다고 속여 놓고 마침내 왕 준을 습격하였다. 준은 싸웠지만 대적하지 못하고 배를 타고 남쪽으로 달아나니 조선은 마침내 위 만(衛滿)의 차지가 되었다. 기자로부터 41대를 전하였으니 대개 9백 28년만에 나라를 잃었던 것이다.

기 준은 축출됨에 측근의 신하들과 궁인을 거느리고 한(韓)의 지역인 금마군(金馬郡)에 들어가 살면서 마한 왕(馬韓王)이라 일컬었다. 50여개의 작은 나라를 통치하였고 여러 대를 전하였다. 그 후 신라 고구려 백제 등 3국이 점점 커지게 되니, 마한은 점차 쇠약하여졌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 26년에 마한을 습격하여 그 나라를 병합하였다. 기씨(箕氏)가 마한을 주재한지 또 2백년만에 망하였으니, 왕위를 전한 것이 전후를 합하여 모두 1천 1백 20여년이다.

찬(贊)은 다음과 같다.

 

아! 태사여 ?歟大師

명이 괘(明夷卦)38)의 비운을 만났도다 運遭明夷

안은 정명(貞明)하나 겉은 암회(暗晦)하고39) 內貞而晦

때를 따라 의(義)를 재정하였네. 製義隨時

머리 풀어 종이 되고 거문고 타 곡조 만드니 被髮操音

하늘만이 그 마음 알아주겠지 惟天我知

조국이 이미 망하였으니 宗國旣淪

슬프다 어데로 돌아갈건가 嗚呼曷歸

구주(九疇)를 창희(蒼姬:문왕을 가리킴)에게 전수하고 法授蒼姬

몸은 동녘40)에 와 다스리었네. 身?靑土幾

크게 국토를 개척하여 誕闢土宇

낙랑(樂浪)41) 에 도읍하였네. 樂浪作京

긴 밤 어둠같은 첩역(첩域)42) 땅을 첩域長夜

비로소 해나 별처럼 밝히었네 肇昭日星

팔조(八條)의 금법 만들고 禁設八條

예악(禮樂)으로 문화 선포하였네. 文宣禮樂

대동강은 맑고 맑고 江淸大同

태백산(太白山)은 높았네 山重太白

자손은 연이어 번창하니43) 子孫繩繩

천년의 봉사(奉祀) 정해졌네 千祀是卜

오세(五世)에 끊어지지 않았으니44) 五世不斬

아직도 끼친 은혜 받고 있다오 ?受遺澤

어진 임금에게 제사로 보답하기 報祀仁闢

하늘이 다하도록 어젯일같이 하네 極天如昨

 

삼가 상고하건데 하늘이 뭇백성을 내심에 반드시 성현을 내리시어 이를 주재케 하시고 화육(化育:造化조화가 만물을 자라게 함.)을 돕고 인문(人文)을 밝게 베풀어 삶을 완수케 하시고, 인하여 교화를 제정하게 되니, 복희(伏羲)로부터 이하 삼왕(三王:우·탕·문무)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지도해 주셨으니 그러므로 명하여 임금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 동방에도 백성이 있어 살아온지 중국에 뒤지지 않은 것 같은데, 아직 예지(睿智:천지 만물에 깊이 통하는 성인의 지혜.)를 지닌 성신이 나오시어 군사(君師:임금이며 사표를 겸칭함)의 구실을 다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물론 단군(檀君)께서 제일 먼저 나시기는 하였으나 문헌(文獻:옛것을 증거할 만한 기록이나 살아 있는 현인)으로 상고할 수 없다.

삼가 생각하건대 기자께서 우리 조선에 들어오시어 그 백성을 비루한 오랑캐로 여기지 않고 후(厚)하게 양육(養育)하고 힘써 가르쳐 주시어 머리를 틀어 얹는 오랑캐의 풍속을 변화시켜 제로(齊魯)45)의 나라로 만들어 주셨다.

그리하여 백성이 지금에 이르도록 그 은혜를 받아 예악의 습속이 왕성하게46) 계속되고 쇠퇴함이 없었으니, 공자께서 부해(浮海:배를 타고 동방으로 오고 싶어 하신 말씀.)하려47) 하시고 욕거(欲居:구이九夷에 살고자 한 말씀.)하신48) 뜻을 가지게 되어 우(禹)가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탄식49)이 세월이 갈수록 더욱 깊다.

훌륭하신 기자여! 이미 무왕에게 홍범을 베풀어 주시어 그 도(道)가 중국에 밝았고 홍범의 나머지를 미루어 치화(治化)가 삼한(三韓)땅에 흡족하게 되었다. 자손들이 왕위를 전하여 1천여년을 내려오니 임금들이 경모(景慕)하고 숭앙(崇仰)하기를 중천의 해와 달이 보인 듯이 하며 그 덕을 존숭하고 은공을 갚으려 대대로 그 도를 독실히 거행하고 있으니 진실로 원성(元聖: 큰 성인)이 아니고서야 어찌 능히 이와 같은 성대함을 이룰 수 있으리오.

아! 성대하도다.

제(齊) 나라 사람이 다만 관중(管仲)50)과 안자(晏子)51)가 있는 줄만 아니 이는 진실로 우물안에 앉아서 하늘을 보는 편협한 견해임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수사(洙泗: 공자의 출생지 및 그 학문을 이름.)의 유자들이 공부자(孔夫子)의 미언(微言:정밀 은미한 말씀.)을 깊이 연역(演繹)하고 낙민(洛민: 정자와 주자를 이름)의 선비들이 정자(程子)·주자(朱子)의 끼친 가르침만을 치우치게 전하는 것도 또한 일리가 있다.

그런데도 우리 동방은 기자의 망극(罔極)한 은혜를 받았으니 그 실적(實跡)에 대하여 마땅히 집집마다 읽고 사람마다 익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 선비가 남의 갑작스런 질문을 받으면 분명한 답변을 할 사람이 적으니, 그것은 여러가지 서책이 없어져서 이것을 널리 배울 수 없는데 연유하는 것인가 한다.

윤공 두수(尹公斗壽)52)가 일찌기 사명(使命)을 받들고 중국천자께 조현(朝見)하였더니 중국 조정의 사인(士人)들이 기자의 한 일에 대하여 많은 질문을 하여 왔다. 윤공이 단독으로 대답53)하지 못함을 민망스럽게 여겼다.

이미 돌아온 뒤에 널리 경·사·자·서(經史子書)54)를 참고하여 사실(事實)을 수집하고 성현의 논하신 것과 그 이하 시인(詩人)이 읊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워 모아 서책을 만들어 책이름을 기자지(箕子志)라고 하였으니, 그 공로가 참으로 컸고 후학에게 또한 지극히 좋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겠다.

다만 생각되는 것은 경전(經傳)을 뒤섞어 편찬하였으므로 계통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珥)가 이에 외람됨을 헤아리지 않고서 기자지 속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골라서 요약하여 한 책을 만들고, 나라를 세운 경과와 세계(世系)며 지나온 연수 등을 대략 서술하고 책이름을 기자실기(箕子實紀)라 하여 읽기에 편리하기를 바란다.

 

< 주 >

1) 우(禹)가 신귀(神龜)의 부문(負文)을 본떠 만든 것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이니 아홉가지로 되어있다. 기자(箕子)가 이를 부연 설명하여 무왕(武王)에게 전한 것으로 전해 온다.《書 洪範》

2) 천자가 직접 통치하는 왕성을 중심으로한 사방 500리의 안에 봉해진 제후,

3) 관명.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으 구분이 있다. 이른바 삼공(三公)의 하나이다.《書 周官》

4) 금본 죽서기년(今本竹書紀年)에는 은(殷) 나라의 29대왕으로 되어 있고 역대제왕연표(歷代帝王年表)에는 27대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왕(紂王)과 미자(微子)의 아버지이고 기자와는 형제의 열에 있었다. 역 태괘(易泰卦)에 제을귀매(帝乙歸妹)라는 말이 보인다.

5) 현명한 태자(太子),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에 "一有元良 萬國以貞 世子之謂也"라고 보인다.

6) 탕왕(湯王)은 나라를 세우고 그의 선조인 설( )이 상(商)에 봉하여졌었으므로 그대로 국호를 상이라고 하였다. 그후 반경(盤庚)에 이르러 도읍을 은(殷)으로 옮기고 이내 국호를 은이라 하였으므로 후세에서는 상과 은 두가지 이름을 병용하고 있다. 건국하여 644년을 유지하였고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의 하나이다.

7) 관명. 소사(少師)·소부(少傅)·소보(少保)의 구분이 있다. 삼공의 다음가는 위치이며 삼고(三孤)라고도 한다. 《書 周官》]

8) 기자와 같이 은의 주왕의 제부(諸父)이다. 주의 망국을 구해보려고 끝까지 간하다가 죽었다. 은나라 삼인(三仁)의 한 사람이다.《史記 三》

9) 악부 금곡가사(樂府琴曲歌辭)의 하나, 일명 기자음(箕子吟) 이라고도 한다. 조는 금곡을 이름이다. 《史記 微子世家》

10) 은의 서백(西伯)인 문왕(文王)의 아들로 이름은 발(發)이다. 문왕이 죽자 장사도 지내기 전에 군사를 일으켜 주를 죽이고 은을 멸망시켰다. 나라를 세워 주(周)라하니 그 제1대 임금이다. 주의 문화를 자찬하는 자들에 의하여 성인으로 추대되고 있으나 단점도 많이 지적되고 있는 인물이다. 《史記 四》

11) 문왕(文王)의 서자(庶子). 주공과 함께 무왕을 도와 삼공(三公)에 오름. 북연(北燕)에 봉하여 졌으므로 소공 또는 소백(召伯)이라고 일컫는다. 섬(陝)의 서쪽지방을 다스려 교화를 깊이 폈다. 《史記 四》

12) 우왕(禹王)의 아버지. 요제(堯帝)의 명을 받아 치수(治水)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곤은 천명을 순종하지 않고 중인과 불화하고 사람을 상하고 물건을 해쳤다고 한다. 사흉(四凶)의 하나로서 순제(舜帝)에 의하여 우산에 갇혀 죽음에 이르렀다. 《書 舜典》

13) 우주간에 쉴새 없이 운행되는 다섯가지 원소. 즉,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를 이른다. 《書 洪範》

14) 몸을 닦는 다섯가지 요목이니, 모·언·시·청·사(貌言視聽思)이다. 《書 洪範》

15) 백성을 다스리는 여덟가지 요목이니, 식·화·사·사공·사도·사구·빈·사(食·貨·祀·司空·司徒·司寇·賓·師)이다. 《書 洪範》

16) 세·월·일·성신·역수(歲·月·日·星辰·曆數)이다. 《書 洪範》

17) 황은 임금이오 극은 표준과 같으니, 임금이 표준 세움에 사방이 이 표준에 합하여 어긋나지 않도록 취정하는 의미를 오황극(五皇極)에서 말한 것이다. 즉,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도로 다른 팔주(八疇)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書 洪範》

18) 정직·강극·유극(正直·剛克·柔克)이다. 《書 洪範》

19) 계는 상고한다는 뜻이니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복서(卜筮)를 하여 결정함을 말한다. 《書 洪範》

20) 서는 하나뿐이 아니고 많다는 말이다. 징은 징험(徵驗)이니 우·양·욱·한·풍(雨·暘· ·寒·風)등이다. 이것이 각각 때로써 오는 것이므로 시(時)가 포함되는데 때에 맞는 휴징(休徵)이 있고 때를 잃은 구징(咎徵)이 있다. 《書經 洪範》

21) 수·부·강녕·유호덕·고종명(壽·富·康寧·攸好德·考終命) 《書經 洪範》

22) 육극(六極)으로 흉단절·질·우·빈·악·약(凶短折·疾·憂·貧·惡·弱) 《書經 洪範》

23) 편은 부중(不中)이오 파는 불평(不平)이라 하였다. 《書 洪範》

24) 작은 순리 당연이 아니고 사의로 작위(作爲)를 가하는 것이니 성인이 아니면 호오(好惡)가 순리 자연일 수 없다. 《書 洪範》

25) 무당(無黨) 당은 공(公)하지 않은 것이다. 《書 洪範》

26) 탕탕은 넓고 먼 것이오 평평은 평이(平易)한 것이라고 하였다. 《書 洪範》

27) 반은 상리(常理)에 배반(倍反)하는 것이오 측은 바르지 않은 것이다. 《書 洪範》

28) 편사(偏邪:편은 정의 반대,사는 직의 반대)하지 않은 것이다. 《書 洪範》

29) 회는 합하여 극으로 오는 것이고 귀는 극으로 와 이르는 것이다. 회는 면강노력해서 황극에 합하여 오는 것이고 귀는 황극에 도달한 것을 이르니 황극과 내가 둘이냐 하나냐의 구분이 있다. 극은 임금이 세운 지극한 의(義)를 이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글에 나아가 말하면 준의·준도·준로(遵義·遵道·遵路)는 회기극(會其極)을 이르고, 탕탕·평평·정직(蕩蕩·平平·正直)은 귀기극(歸其極)의 일이다. 《書 洪範》

30) 고대의 농경 조세 등을 위하여 만든 전지(田地)의 제도이다. 하(夏)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은(殷)과 주(周)가 다소 내용을 달리하기도 하나 대체로 10분의 1을 조세로 받았다. 이 제도를 알 수 있는 것은 「論語」顔淵과 「孟子」梁惠王 上· 文公 上과 어류(語類)등에 보인다.

 대체로 사방 1리(里)의 땅을 1정(井)이라 하고 면적은 9백 묘(畝)이니 이를 정자(井字)형으로 9등분하여 8가에 100묘식 분전하고 중앙의100묘를 공전(公田)이라하여 8가가 공동으로 농사지어 조세를 바쳤다. 그러나 공전은 20묘를 8가의 농막터로 떼놓은 나머지 80묘를 실평으로 하였으니 결국 11분의 1세가 되는 것이다.

31) 기자가 설치하였다는 금법은 살인·상해·투도·음란 등을 금하는 법이다. 이들은 고대 인류사회에 공통되는 법이라는 이설이 있고, 또한 팔조의 기타의 전모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後漢書」東夷傳에 기자의 8조를 말하고는 있다.

32) 맥수가(麥秀歌):상은조(傷殷操)라고도 하니, 기자가 주(周)에 조회 바치러 가다가 은(殷)나라 터를 지나게 되니, 궁궐은 무너지고 보리 이삭만 패인 것을 보고, 슬퍼서 소리내어 울자니 그럴수도 없고, 흐느끼자니 아낙네 같아서 맥수가를 지어 읊었다고 한다. 《史記 微子世家》

33) 교동(狡童) 교활한 아이라는 말이니 주왕(紂王)을 가리킨 것이다. 《麥秀之歌》

34) 만반한(滿潘汗):압록강의 고칭이다. 《魏志 東夷 韓傳 注》

35) 노관:한고조(漢高祖)와 동향인이고 동일생이라고 한다. 장군이 되어 유공하므로 연왕(燕王)으로 봉했는데 후에 진 희(陳 :고조에 반하였다가 죽음.)의 일로 흉노(匈奴)로 달아났다. 동호로왕(東胡盧王)에 봉하여졌다. 《漢書 34》

36) 「史記」朝鮮傳에는 압록강을 이르고「隋書」高麗傳에는 대동강을 이르고《三國史記》에는 예성강과 임진강을 이른다고 있다. 한편, 단재(丹齋)등 민족사관을 지닌 학자는 요하(遼河) 어름으로 잡고 있다.

37) 서옥(瑞玉)이니 제후를 봉할 때 신부(信符)로 주는 것으로 상원하방(上圓下方: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남)하며 작위에 따라 각각 장단 등의 차이가 있다.

38) 위는 곤(坤) 아래는 이(離)로 된 괘명(卦名)이니 이명(離明)이 곤음(坤陰)의 상태를 받는 의미를 담고 있어 어진이가 때를 못만나, 참소를 근심하고 비웃음을 두려우하여 감히 그 밝은 지혜를 드러내지 못하는 형상이다. 《易 明夷》

39) 명이괘(明夷卦)는 안은 정명(貞明)하고 밖은 음회(陰晦)하여 내명을 가리우고 상해하는 의상(意象)을 가지고 있으므로 군자가 이 괘를 만나면 이렇게 하는 것이 순리이다. 이에 반하여 자신의 현덕을 드러내는 것은 역리이다. 《易 明夷》

40) 청기(靑土幾):기는 기(畿)와 같고 청은 동방을 의미하니 조선을 가리키는 말인가 한다.

41) 한무제(漢武帝)가 조선을 쳐 이기고 나누어 사군(四郡)을 두었는데 낙랑은 그 중의 하나이다. 「後漢書」 東夷傳. 평양을 이른다고도 한다.

42) 첩은 비목어(比目魚)니 조선의 근해에서 보이는 고기이므로 조선의 별명으로 쓰이고 있다. 장야(長夜)는 분명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 《漢書 郊祀志》

43) 메뚜기의 훙훙(薨薨)한 것과 같이 자손이 끊이어지지 않고 많은 모양. 《詩 周南斯》

44) 군자고 소인을 논할 것 없이 5대가 지나면 그 은택이 끊어지는 것이나 기자의 공덕은 커서 5세가 지나도 끊어지지 않고 영원하다는 의미를 이른 말. 《孟子 離婁下》

45) 제나라는 강태공(姜太公)이 건국한 나라이고, 노나라는 주공(周公)이 건국한 나라이니 두 나라가 모두 문화가 융성한 나라임.

46) 많고 왕성하여 떨어지지 않는 것. 《書 大禹謨》

47) 천하에 현군이 없음을 상탄한 말이니 정자(程子)는 이 말을 가설지언(假說之言)이라 하고 주자(朱子)는 이 말을 집주로 하였다. 《論語 公冶長》

48) 구이 속에 동이(東夷)가 들어있지 않으나 동방을 가리키지 않은 것이라고 하지는 못하리니 조선을 가리킨 것도 된다. 이 말씀도 부해의 말과 같이 현군이 없음을 탄식한 말이다.

49) 《左氏 昭公元年》에 우왕이 아니면 나는 고기가 되었으리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우왕의 공덕을 찬양한 말이다. 《論語 憲問》에 공자는 관중(管仲)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피발좌임(被髮左 )하였으리라한 것과 같다.

50) 춘추시대 제나라 사람. 이름은 이오(夷吾)니 중(仲)은 자이다. 시(諡)가 경(敬)이므로 관경중이라고도 부른다. 환공(桓公)을 도와 제후를 규합(糾合)하여 패장(覇長)이 되게 하였다. 맹자는 관중의 왕도를 알지못하고 패술(覇術)을 행하였으므로 취하지 않는다는 증 서(曾西)의 말을 인용하여 자기 의견으로 삼아 말하였다. 공자는 공효의 한측면에서 말씀하시어 "관중이 아니면"이라는 말씀을 하셨고 증 서와 맹자는 왕·패(王覇)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니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孟子 公孫丑 上·論語 憲問》

51) 춘추시대 제나라의 대부. 제경공(齊景公)의 상(相)이 되었다. 이름은 영( )이오 자는 평중(平仲)이니 그 임금을 드러나게 하였다고 한다. 공자는 그 위인됨을 칭찬하였다. 맹자는 관중에 대하여서와 같이 왕도를 힘쓰지 않았으므로 취하지 않았다. 《論語·左氏·史記》

52) 1533년(중종 28)∼1601년(선조 34)의 인물이다. 문필이 뛰어난 문신으로 좌의정 영의정까지 하였다. 1577년(선조 10)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니 율곡이 기자실기를쓰기 3년전도 못되니 윤 두수가 편저한 기자지를 본 것은 아마 잘해야 1년전후일 것같다.

53) 단독으로 응대함. 남의 나라에 사신가서 군명을 완수함. 《論語 子路》

54) 서적을 분류하는 법이다. 흔히 경사자집이라고 하니 아마 내용은 같은 말이 아닐까 한다. 경서(經書)와 역사(歷史)와 제자류(諸子類)와 시문집류(詩文集類)를 이른다.

 

(이 글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나온 '율곡전서'를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