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문답(東湖問答)

 

 

《동호문답(東湖問答)》은 율곡 선생이 34세 때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재임 중 자신의 정치관(政治觀)을 문답식으로 서술하여 선조에게 올린 글이다.

당시에는 젊은 관료들을 선발하여 잠시 직책을 떠나 독서당(讀書堂)에서 여유있게 글을 읽도록 하였는데, 이때 월과(月課:연구결과보고서)로 제출한 것이다.

이 내용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나온 《율곡전서》를 인용하였습니다.


《동호문답(東湖問答)》은 율곡이 선조 2년 9월에 홍문관 교리로서 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며, 왕도정치의 이상과 자신의 철인정치 사상에 대하여 주인과 객이 서로 문답하는 형식으로 저술하여 임금에게 올렸던 글이다.

사가독서(賜暇讀書)란 홍문관의 유능한 젊은 문신을 선발하여 휴가를 주어 잠시동안 정무를 떠나 독서당에서 글을 읽고 연구하여 학문에만 전념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사가독서에 선발되는 사람은 유능하고 학문의 가능성이 있은 젊은 문신이므로 여기에 선발된다는 것은 하나의 영광이자 앞으로 출세의 길도 약속되는 것이었다.

사가독서하는 사람들은 월과(月課: 다달이 제출하는 과제)로 글을 짓게 하였는데 이 '동호문답'도 율곡의 월과로 선조에게 올린 글이다.

동호(東湖)란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 어귀의 한강을 말한다. 도성에서는 한강을 동 · 남 · 서 3방향에 따라 달리 불렀기 때문에 그 이름이 제각각이었다. 즉 옥수동 앞은 동호(東湖),  용산 앞은 남호(南湖), 마포 어귀는 서호(西湖) 등으로 불렸다. (동호대교는 여기서 유래한 듯함)

독서당(讀書堂)이란 말 그대로 글을 읽던 집으로서, 조선시대 때 나라에서 젊은 학자들에게 특별한 말미를 주어 글을 읽게 한 곳이다. 일명 호당(湖堂)이라고도 하는데 기원은 세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복궁 안에다가 집현전을 설치해 학문을 장려한 세종은 과거에 급제한 관리 중에서도 젊고 어진 이를 뽑아 글을 읽도록 배려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세종 8년(1426)에는 집현전 학사들에게 긴 말미를 주어 조용한 절간에 가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시초로 문종, 단종 시대로 이어지다가 세조 때 잠시 유명무실해진 후 성종 때에 제자리를 잡는다.

성종은 즉위 후 용산 한강가 언덕에 있는 빈 절을 고쳐 사가독서하는 장소로 삼고 그 이름을 독서당(讀書堂)이라 불렀다. 독서당이란 이름이 이때 처음 등장한 것이다. 용산 앞강을 남호(南湖)라고 했기 때문에 용산독서당은 남호당(南湖堂)이라고도 불렀다.

중종 12년(1517)에는 한강변의 한적하고 경치가 뛰어난 곳에 새로 독서당을 짓게 했는데, 이곳이 바로 동호당(東湖堂)이라 불리는 동호독서당이다. 《동호문답(東湖問答)》이란 제목도 바로 이에 연유하고 있다.

동호독서당은 이후 70여년간 조선시대 최고의 문사 양성기관으로 이름을 떨쳤고, 조광조, 주세붕, 이황, 노수신, 심의겸, 정철, 이이, 유성룡, 이항복, 이덕형 등이 모두 여기를 거쳐갔으며, 조선왕조 때 명성을 날린 문신들 중 독서당에 뽑혀 수학 연마하지 않은 이가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집현전과 홍문관 못지 않게 높이 평가됐던 독서당은 그 명성에 걸맞게 공부하는 당원에 대한 예우가 매우 극진했다. 특히 성종, 중종, 명종 등은 궁중의 음식을 내려주며 당원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는데 성종은 수정으로 만든 술잔까지 하사했다.

동호독서당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폐지됐으며, 선조 때 다른 곳에 임시로 설치돼 겨우 명맥만 유지되다가 숙종 이후에는 그마저 시행되지 않았다.

《동호문답(東湖問答)》은 총 11개 조항으로 되어있다.


  1. 군도(君道)

  2. 신도(臣道)

  3.군신상득지난(君臣相得之難)

  4.동방도학불행(東方道學不行)

  5.아조고도불부(我朝古道不復)

  6.당금지시세(當今之時勢)

  7.무실위수기지요(務實爲修己之要)

  8.변간위용현지요(辨奸爲用賢之要)

  9.안민지술(安民之術)

  10.교인지술(敎人之術)

  11.정명위치도지본(正名爲治道之本)